고갯길이 거슬렸다 … 왕은 ‘답정너’였다
김홍준 2023. 5. 6.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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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24·끝〉 서울 230개 고개
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24·끝〉 서울 230개 고개
태종(1367~1422)은 이렇게 승하 7년 전부터 묻힐 곳(수릉·壽陵·살아있을 때 미리 마련해 두는 임금의 능)을 찾았다. 원경왕후 민씨(1365~1420)가 세상을 뜨고 2년 뒤 태종도 뒤따랐다. 태종이 묻히고 나서 능은 헌(獻)으로, 할미산은 대모산(大母山·293m)으로 부르게 됐다. 현재의 대모산은 근처 일원동·내곡동·자곡동·세곡동 주민들에게는 명산이다. 낮으면서도 산세가 유려하다. 지난달 25일 만난 이서윤(70·세곡동)씨는 “운동을 적당히 할 수 있는 길이 많아 고마운 산”이라며 “명당이 따로 없다”고 말했다. 하륜도 태종에게 그렇게 아뢨다. “좋은 땅을 얻었습니다.”
논고개·애오개·버티고개는 지하철역명
대모산으로의 개칭은 어명이었다고 전해지니, 당시 이미 집권 4년 차였던 세종(1397~1450)이 하명했음직하다. 그런데….
왕이 물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묻힌 헌릉 근처의 고갯길을 폐쇄하는 것을 놓고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 고개는 이름하여 헌릉고개다.
서울에는 230여 개의 고개가 있다. 40여 개의 산이 물결치면서 빚었다. 논고개(논현), 애오개(아현), 한티(대치), 버티고개 등 지하철역명으로 쓰이는 고개가 있고, 무쇠막고개·풀무고개(대장간), 무당고개(굿) 등 진득한 삶이 만든 고개도 있다. 진고개·구리개·큰고개(대현) 등 다른 길을 내느라 깎이고 파여 고개인가 싶은 곳도 있다. 그중 하나가 헌릉고개다.
“고개를 폐쇄해야 하옵니다.”
최양선이라는 자가 있었다. 잡과 출신의 서운관(書雲觀, 고려 시대부터 있던 천문학·지리학 등을 관장한 관청) 관리였다. ‘조예 깊은 풍수지리학자’ 또는 ‘요망한 술사(術士)’로 평이 갈린다. 최양선은 “헌릉의 산맥을 배양하는 일이 간절하여 잠시도 늦출 수 없는 일”이라며 헌릉고갯길을 폐쇄하자고 아뢴다(세종 12년 7월 7일).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했지만, 요샛말로 하면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그 답만 하면 돼’의 줄임말)였을까. 의정부·육조 등에 검토를 지시했건만 한 달여 뒤 세종은 “내 생각으로는 막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세종 12년 8월 21일)”고 했다. 하지만 지관 고중안과 이양달은 “이 맥에는 사람의 발자취가 있는 것이 더욱 좋으므로, 막는 것은 부당합니다”라고 했다. 예조에서는 “(산세의) 잘록한 허리에는 반드시 길(고갯길)이 있는데, 어찌 해롭겠습니까”라고도 했다. 헌릉고개 폐쇄 논쟁은 3년 뒤에도 이어졌다. 세종은 집현전 유신까지 끌어들였다. 집현전에서도 “고갯길은 폐쇄할 이유가 없다”고 강변했다(세종 15년 7월 22일).
결국 헌릉고개는 폐쇄됐을까. 세종실록에서는 ‘헌릉 산줄기 좁은 길의 통행금지를 정지한다’고 적고 있다(세종 29년 2월 19일). 다음 왕인 문종(1414~1452)은 헌릉고개를 ‘천천현(穿川峴)’이라고 부르며 ‘세종의 전교(傳敎·임금의 명령)에 의해 길이 막혔다’고 표현했다(문종 즉위년 10월 20일).
그런데 헌릉고개는 어디일까. 정경연 인하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정통풍수학회 명예이사장)는 “왕복 10차로 도로를 만드느라 깎이고 패여서 완만해졌지만, 지금의 분당내곡간도시고속화도로 내곡IC 지점이 헌릉고갯마루”라고 밝혔다. 헌릉고개로 사람 통행도 모자라 차들이 쌩쌩 달리니, 세종의 역린(逆鱗·군주의 노여움)이 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성남문화원에 따르면, 헌릉고개는 천천현으로 부르다가 월천현(月川峴)으로 바뀐 뒤 달래내고개가 됐다. 정 교수는 “달래내고개는 현재 교통방송에서 경부고속도로 차량 정체의 대표 지점으로 일컬어지는 곳(양재IC와 판교JC 사이)이 아니라 그 동쪽”이라고 말했다. 최원석 교수는 “헌릉고개 폐쇄 여부 논쟁은 풍수를 둘러싸고 왕권과 신권, 신권과 신권 등 정치세력간에 벌어진 주도권 다툼 중 하나”라고 밝혔다. 태종과 세종이 자신의 능 자리를 직접 고르고, 정조(1752~1800)가 현륭원(사도세자의 융릉)의 입지를 결정하고 건물 배치까지 관장한 건, 그만큼 왕권이 강했다는 의미다.
미국 대사관 숙소였다가 최근 공원으로 탈바꿈한 경복궁 동쪽 송현(松峴)도 풍수지리로 이름 붙은 고개다. 백악에서 흘러내려 온 기운을 보호하기 위해 소나무를 심었고 베지 못하게 했다. 정경연 교수는 “조선 왕실의 풍수문화는 권력의 안녕을 꾀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 풍수지리학자는 “지금도 일부에서는 풍수는 미신이라면서도 뒤로는 조상의 묏자리를 알아보기도 한다”며 웃었다.
진고개·구리개 등 깎이고 파인 고개도
지난 2일 찾은 미아리고개에는 1980년대 100여 개에 이르며 전성기를 달렸던 점집들이 20여개만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미장원을 40년째 운영하는 이영숙(70)씨는 “한쪽은 재개발로 페인트도 안 마른 새 건물이, 다른 한쪽에는 1960년대 모습 그대로 재래식 변기를 쓰는 집들이 뒤섞인 곳”이라며 “우리 미용실에는 구세대, 그러니까 80·90대가 오고 바로 앞 카페에는 20·30대 신세대가 몰린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때만 해도 미아리고개 밖은 경기도 고양이었다. 조선 시대 도성 밖 10리에 해당하는 성저십리(城底十里)였다. 성저십리는 한국전쟁 이후 대부분 서울에 편입됐다.
성저십리의 북쪽 경계는 북한산(836m)이다. 북한산은 조선 왕실이 풍수로 꼽은 외사산(外四山)의 북쪽이기도 하다. 미아리고개 밖, 옛 고양 사람들은 양주로 넘어갈 때 북한산 소귀고개(우이령)를 지났다. 외사산 남쪽은 관악산(829m)이다. 정조는 관악산 옆 남태령을 넘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으로 향했다. 외사산 동쪽 용마산(348m)에는 망우리고개가 있다. 외사산 서쪽은 덕양산(125m)이다. 내사산(동쪽 낙타산, 서쪽 인왕산, 남쪽 목멱산, 북쪽 백악산) 안의 고개 이름이 유난히 많이 전해지는 이유는, 조선의 도읍으로 스토리가 입혀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동서남북, 2년 6개월에 걸쳐 고개 120여 곳을 다녀왔다. 40여 년간 대관령을 지킨 행상이 건네준 커피는 아직도 입안에서 달콤하게 맴돌고 있다. 1970년대 말부터 대간령 숲속에서 살던(취재 당시에는 곧 집을 처분한다고 했다) 이는 알고 보니 반독재 전선에 섰던 인물이었다. 육십령 고갯마루 휴게소의 돈가스는 충만했고 차박을 허용한 주인장의 미소는 살가웠다. 차박하던 이날, 회사 후배가 하늘로 떠났다. 부랴부랴 올라갔지만, 떠나던 길을 배웅할 수 없었다.
일제가 없앤 추풍령 이름을 되찾아왔던 옛 추풍령 면장은 만나기 며칠 전에 운명했다. 회사 선배는 추풍령 기사를 읽고, 자신의 장인어른이라며 뜻밖의 부고기사에 고마워했다. 서울시청에서부터 걸어서 문경새재를 넘어가던 29세 청년은 무사히 부산에 도착했을까. 차로 6박 7일간 2800㎞를 쉬지 않고 누빈 백두대간 80고개 와인딩(winding)은 다시 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버지의 능 자리에 절치부심했던 세종처럼, 미아리 점집으로 향하는 서민처럼, 고개는 좀 더 나은 내일을 살기 위한 오늘의 고심이 만든 길이다. 이걸 120여 개 고개를 다녀와서야 알았다. 연재를 마친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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