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컷은 수동적? 잔혹하고 바람기 넘치는 동물 왕국

2023. 5. 6.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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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암컷들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암컷들
루시 쿡 지음
조은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동물의 왕국’에선 수컷은 오랫동안 능동적 진화의 주체로 그려졌다. 이런 저돌적인 수컷과 달리 암컷은 자신을 내어주는 수동적 어머니상으로 비유됐다. 경쟁심이 별로 없으며, 짝짓기도 주체적 욕구가 아닌 마지못한 의무로 받아들였다고 봤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 교수에게 동물학을 배우고 생태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활약하는 지은이는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 오랜 믿음은 “(성역할에 대한 인식이 전근대적이던) 1950년대 시트콤 같다”고 비판한다.

지은이는 실제 자연세계에서 암컷의 행태와 역할은 대단히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과거 성차별적 신화가 생물학에 도입돼 동물의 암컷을 바라보는 시각이 왜곡됐다는 이야기다.

바다에서 물 위로 뛰어오르는 범고래. 2019년 일본 홋카이도 라우스 인근에서 포착된 모습이다. 이 책에 따르면 범고래 암컷은 야생동물로는 보기 드물게, 더 이상 새끼를 낳지 않게 된 이후에도 수십 년을 살면서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 역할을 한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러면서 헌신적이고 수동적인 어머니상을 깨부수는 사례를 줄줄이 제시한다. 자기가 나은 알을 버리는 암컷도 적지 않다. 암컷이 수컷보다 더 화려하게 생긴 물꿩은 바람난 아내를 둔 수컷들이 모여 공동으로 새끼를 키우기도 한다. 압권은 동물 중 일부일처는 전체의 7% 정도이며, 많은 암컷이 여러 상대를 전전하며 바람둥이 기질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다.

무리의 권력이나 잔혹함도 수컷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러 종에서 ‘알파 암컷’이 다양한 형식으로 권력을 유지한다. 아프리카 콩고의 보노보는 자애로움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고, 여왕벌은 잔인함으로 힘을 행사한다.

암컷끼리도 살벌하게 경쟁한다. 아프리카 토피영양의 암컷은 잘난 수컷을 놓고 거대한 뿔을 앞세워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운다. 아프리카 서남부에 사는 깜찍한 외모의 미어캣의 여족장은 경쟁자의 새끼를 제거해 번식을 막을 정도로 잔혹하다.

동물의 성은 실로 다양하기 짝이 없다. 암거미는 교미가 끝나기도 전에 연인을 먹어치우는 성적 동족포식 행위를 하는 ‘팜 파탈’(femme fatale)이다. 반드시 암수가 어우러져야 후손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일부 암도마뱀은 수컷 없이 복제만으로 번식한다.

지은이는 이런 연구사례를 제시하면서 “지난 수십 년간 생물학 분야에서 암컷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두고 혁명이 일어났다”고 강조한다. 예로 암두더지의 생식샘은 난소와 정소 조직을 모두 갖춰 난소고환으로 불린다. 번식기에는 난소가 팽창돼 난자를 생산하고, 생식이 끝나면 난소가 축소되고 정소가 확대된다. 정소 조직은 라이디히 세포에서 근골격 발달과 공격성을 강화시키는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분비하지만 정자는 생산하지 않는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성호르몬으로 불리지만 사실 암수 모두에서 분비된다. 이 호르몬의 다량 분비는 두더지의 힘겨운 지하생활에 도움이 된다. 두더지 암컷은 이 호르몬에 힘입어 땅을 파고 새끼를 지키며 먹이인 지렁이를 확보한다.

주목할 점은 생존을 위한 테스토스테론이 다량 분비되는 동안엔 암컷의 생식기가 수컷과 비슷하게 변한다는 사실. 이처럼 암컷이 생식 때를 제외하고는 수컷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두더지는 생물학적 성이 고정적이고 이원화됐다는 기존 인식에 도전한다.

생식기만 보고는 암수 구분이 어려운 건 두더지만이 아니다. 점박이하이에나, 아마존 거미원숭이, 마다가스카르의 고양이목 동물 포사 암컷의 외음부는 수컷과 구분이 어렵다. 최대 80마리가 모인 점박이하이에나 무리에서 수컷은 먹이·성을 구걸하며, 암컷은 지도자로 모계 사회를 유지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짝 선택에서 암컷이 수동적이라는 주장은 신화에 불과하다. 북미에 사는 산쑥들꿩 수컷들은 초봄이면 꼬리 장식을 드러내며 구애를 위한 춤 대결을 벌인다. 이들은 목을 부풀려 비트박스 같은 소리까지 낸다. 암컷들은 수컷들의 이런 코미디 같은 쇼를 느긋하게 지켜보며 마음에 드는 짝짓기 대상을 고른다.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의 코주부원숭이 수컷의 코가 길고 덜렁거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암컷들이 좋아하니까. 동남아시아와 남아프리카 등에 주로 서식하는 자루눈파리가 몸길이보다 더 긴 눈자루의 양쪽 끝에 눈이 달린 이유도 암컷이 눈자루가 큰 수컷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야생동물 암컷은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위해 현재의 상대를 과감하게 버리기도 한다. 지은이는 케냐의 마사이 마라 국립공원에서 매력적인 사자의 포효 녹음을 틀어 다른 수컷들과 어울리고 있던 발정기 암컷을 불러냈던 경험을 소개한다. 한밤중에 소리를 냈더니 암컷 한 마리가 형제 관계인 두 마리의 수놈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 암컷은 소리를 듣고 짝짓기 대상을 바꾸고 싶어 쫓아왔고, 두 수놈은 그런 암컷을 따라온 것이다. 지은이는 동물의 한 성은 방종하며, 다른 성은 정숙하다고 여기는 기존 관념이 실제 생물 세계에선 난센스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지은이는 이처럼 동물세계에서 다양하게 발견한 사례를 바탕으로 성과 성역할의 본질에 대한 오랜 고정관념을 깨부순다. 전통적 남성지배사회였던 진화생물학 분야에서 페미니즘이 얼마나 어떻게 떠오르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원제 Bitch.

채인택 전 중앙일보 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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