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독립유공자 예우 안 하면, 한국 위기 때 누가 돕겠나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은 독립유공자에 관한 일이라면 내 일처럼 발벗고 나서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오랜 기간 외국인 독립유공자 발굴 및 지원을 위해 노력해 왔다. 신사참배 거부 등 항일운동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 윌리엄 린튼의 손자인 인 소장은 2012년 외국인 유공자 후손 중 처음으로 특별 귀화해 국적을 취득한 ‘어엿한 한국인’이다. 현재 보훈처 정책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는 인 소장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외국인들의 헌신과 희생이 차지하는 비중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단지 이방인이 한국 독립운동에 협조했다는 정도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며 “범정부 차원에서 독립운동에 기여한 외국인 관련 사료 발굴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선 유공자 명단과 사유 공개 원칙
Q : 할아버지는 어떤 연유로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A : “선교사였던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전북 전주시 신흥학교(현 전주신흥고)와 기전여학교(현 전주기전여고) 교장을 맡으셨습니다. 3·1운동 때는 독립 만세 현장을 곁에서 지켜본 뒤 미국 언론 기고를 통해 일제 탄압의 부당함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1940년엔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다가 광복 이후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조선이 겪는 부당한 핍박과 설움을 결코 외면할 수 없으셨던 거죠.”
Q :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 조부 말고 린튼가에 더 계신 걸로 압니다.
A : “할아버지의 장인어른인 유진 벨 선생도 일찌감치 한국에서 선교 활동과 의료 사업을 펼치며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어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원산 전투에, 외삼촌은 장진호 전투에 각각 참전도 하셨고요. 한국에서 태어나신 아버지도 할아버지 못지않게 한국에 대한 애착이 강하셨어요. 아버지는 미 해군 장교로 참전하셨는데 ‘내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만큼은 어느 한국인 못지않게 크셨죠.”
A : “그야말로 전우 같은 존재죠. 개화기 때 조선이란 낯선 땅에 처음 발을 디뎠고,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아픔도 조선인들과 함께 견뎌냈으니까요. 겉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명예를 중요시하는 가치관 등이 서로 비슷해 한국 문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저와 우리 가족에게 한국은 어느새 제2의 고향이 아닌 ‘제1의 고향’이 됐습니다.”
Q : 그동안 외국인 독립유공자에 대해서는 사회적 관심이 덜했던 게 현실입니다.
A : “외국인 유공자의 공적을 기리는 건 단순히 독립유공자 수를 늘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한국의 독립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외연을 확장하는 것과도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조선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항일운동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독립운동이 단지 한반도 내부 차원을 넘어 세계 평화와 인도주의 회복을 위한 노력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분명한 사례가 될 테니까요.”
Q : 외국인 독립유공자 발굴과 후손 지원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A : “동의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외국인 독립유공자 발굴이 어렵다고 해서 그냥 포기하고 말 거냐고요. 힘이 들더라도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닌가요. 당장 외국인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고 봅니다. 시대별로 서훈 기준도 다르고 경우에 따라 공적과 훈격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적잖거든요.”
Q : 외국인 유공자의 본적에 따라 예우를 차별한다는 지적도 있던데요.
A : “저처럼 외국인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한국에 귀화해 살고 계시는 어떤 분은 주택 청약 때 독립유공자 가산점 혜택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서훈된 그 분 할아버지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였어요. 또 다른 분은 서훈 훈격에 따라 지원되는 보훈 연금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계시기도 하고요. 국가가 인정한 독립유공자인데 내국인 후손과 외국인 후손의 예우가 다른 건 엄연히 이중 잣대 아닌가요.”
“국가 차원 보훈 원칙 없어 소모적 논쟁”
Q : 최근 정부는 일부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 재심사에 나섰다.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과는 별개로 월북 후 행적 등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도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인 소장은 “국가적 차원의 보훈 원칙이 부재한 탓에 매번 소모적 논쟁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A : “특수성은 달리 말하면 예외 조항을 인정하자는 얘기인데, 지금은 그 예외 조항에 대한 기준조차 명확하지 않은 실정입니다. 반면 미국에선 아무리 공적이 큰 유공자일지라도 적군을 도운 행적이 있으면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아무리 작은 거라도 의심스러운 행적이 제기되면 국가가 공훈을 재검토하고 그 결과를 국민에게 명확히 설명하고 있죠. 즉 미국에선 원칙과 기준에 따라 유공자를 서훈하고 그 명단과 사유도 있는 그대로 공개하는 게 원칙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논란이 불거지고 정부도 독립유공자 평가 등에서 늘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는 모습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Q : 정부도 오는 6월 국가보훈처를 부로 승격하는 등 더 큰 관심을 기울일 계획입니다.
A : “기대가 큽니다. 정부가 유공자 발굴 못지않게 유공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는 데도 힘을 쏟았으면 합니다. 유공자들이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해 주는 거야말로 국가가 해줄 수 있는 진정한 예우일 테니까요. 참전용사들이 제복을 입고 길거리를 거닐 때 시민들이 기꺼이 박수를 치는 장면을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 을사늑약 고발한 영국 기자 베델, 3·1운동 동참 스코필드…외국인 유공자 75명
「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재된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총 75명이다. 국적별로는 중국(34명) 출신이 가장 많고 미국(21명)·영국(6명)·캐나다(6명) 출신이 뒤를 잇고 있다. 그중 5명은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영국 기자 출신인 어니스트 베델(왼쪽 사진)은 외국인 독립유공자 중 유일하게 중국 국적이 아닌 대통령장 수훈자다. 1904년 러·일 전쟁 취재차 조선을 방문했다가 일제의 악행을 목격한 뒤 ‘대한매일신보’와 영어신문 ‘코리아 데일리 뉴우스’를 창간하며 일제 침략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힘썼다. 영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인 덕에 사전 검열을 피할 수 있었던 베델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으로 번역해 보도하는 등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서구에 전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3·1운동의 34번째 민족 대표로 불리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오른쪽 사진)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든 독립유공자 212명 중 유일한 외국인이다. 캐나다 수의사 겸 선교사인 그는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시위 대열에 합류해 함께 만세를 부르고 시위 현장을 사진에 담아 전 세계에 알렸다. 일제가 무고한 양민 23명을 살해한 제암리 학살 사건 때는 제암리에 몰래 들어가 총살·방화 현장을 촬영해 미국·캐나다 등 영미권 언론에 폭로하기도 했다.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후세 다쓰지와 가네코 후미코는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변호사였던 후세 다쓰지는 총독부 등 일제 주요 관공서 폭파를 계획하다 체포된 의열단원 김시현과 일왕 암살 누명을 쓴 박열 등의 변호를 맡아 이들의 무죄를 주장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땅을 빼앗긴 조선 농민들을 위해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박문자’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는 1920년대 일본에서 박열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지사다. 일왕 암살을 위해 의열단을 도와 폭탄 반입을 추진하다 적발돼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1926년 일본 형무소에서 끝내 숨을 거뒀다. 정부는 가네코 순국 92년 만인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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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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