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지 마” “내립시다” 압사 공포에 고성… 불나면 대형 참사 ‘아찔’ [연중기획-안전이 생명이다]
지하철 1∼9호선 혼잡도 100% ↑
열차 만원에도 몸 욱여넣고 타기 일쑤
하차·탑승객 뒤엉키자 병목현상 심화
“출퇴근 때 서로 밀쳐 아찔했던 적 많아
인파에 치여 퇴근후 집에서 구토하기도”
안전의식 부재 사고위험 가중
우측통행 원칙 어기고 폰 보며 뛰어가
역사 내 승객 안전 유도할 인력도 전무
화재 등 비상시 쓸 긴급구호품 태부족
“안전관점 ‘최소’ 아닌 ‘최선’으로 바꿔야”
지난달 25일 오전 7시30분쯤 서울 영등포구 서울지하철 9호선 당산역에 도착한 열차 출입문이 열리자 차량 안 곳곳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승객이 우르르 내리며 발 디딜 틈 없던 차내 상황이 좀 나아지는 듯하더니 몇 초 만에 다시 콩나물시루가 됐다. 비까지 내려 열차 안은 평소보다 더 덥고 습해 짜증 나는데 옆 사람 우산이 콕콕 찔러 불쾌지수를 높였다.
#2. “뭐하는 짓이야!”
지난달 24일 오전 8시 인천 부평구 서울지하철 7호선 부평구청역에서 고함이 울렸다. 열차 문이 열리자마자 인천지하철 1호선과 연계되는 환승 통로를 향해 오픈런이 벌어지면서 먼저 가려던 두 사람이 어깨를 크게 부딪쳐 인파 속에서 넘어질 뻔한 것이다. 자칫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때와 같은 대형 압사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20대 여성은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전국의 지하철, 도시철도에서는 시민의 발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오늘도 시민의 목숨을 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출퇴근 시간대의 혼잡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정부·지방자치단체의 대응 부족과 시민 각자의 안전의식 부재 속에서 무사 귀가는 천운에 맡겨야 하는 듯한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출퇴근 시간대 지하철, 도시철도의 살인적 혼잡은 전국적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오전 대전지하철 1호선 시청역. 열차가 멈춰 서자 질서있는 승하차는 실종되고 하차 승객과 탑승 승객 수백 명이 서로 뒤엉키면서 삽시간에 난장판이 됐다. 일부 승객은 다른 승객을 밀면서 몸을 열차에 욱여넣기까지 했다.
대전의 정부청사역도 마찬가지. 하차 승객이 파도처럼 출구에 몰리자 병목 현상이 발생하면서 거대한 혼잡이 벌어진다. 정부대전청사로 출근하는 박모(31)씨는 “출퇴근 때마다 서로 밀쳐 아찔한 상황이 목격된다”고 우려했다.
지하철 승강장 인파로 ‘아비규환’ 지난 4월 27일 서울지하철 9호선 여의도역 플랫폼에 퇴근길 시민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혼잡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시민의 안전을 고려한 동선 유도가 없어 거대한 인파에 한 명만 넘어져도 압사로 인한 대형 사고 발생 우려가 있다. 남정탁 기자 |
혼잡 문제가 시민 안전을 위협하자 혼잡도 완화를 위한 대책이 나오고 있으나 실효성에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된다. 서울교통공사는 3월부터 지하철 2·3·5호선 운행을 오전 2회, 오후 2회씩 총 4회 증회하고, 서울시메트로9호선은 내년 초 6칸짜리 신규 열차 8편을 추가로 투입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평가가 나온다.
예산·인력 문제로 열차 운행을 한없이 늘릴 수만은 없는 데다 혼잡도가 극심한 구간은 기본적으로 거주·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이라 혼잡도를 획기적으로 낮추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부·지자체·운용기관의 대책이 열차 내 혼잡도 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열차에서 내린 뒤 역사(驛舍) 내에서의 안전 위협도 가볍게 볼 수 없다. 역사 관리 기관의 동선(動線) 관리 부실과 승객의 시민의식·안전의식 부재가 위험을 키우고 있다.
부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지난달 24일 오전 부산도시철도 1·3호선의 환승역인 연산역 개찰구에서는 한꺼번에 빠져나가려는 승객들로 인해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다. 에스컬레이터와 승강기(엘리베이터)도 북적였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길을 걷는 승객이 적지 않았다. 역사 내에서 우측통행은 지켜지지 않았고 승객을 안전하게 유도하는 인력도 전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 30일 서울에선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이 일어났다. 서울 양천구 목동 지하철 9호선 등촌역 역사 내에서 불이 나 승객이 대피하고 전동차가 역을 2시간가량 무정차 통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승객 밀도가 높은 지하철 열차 안이나 역사에서 화재가 발생할 경우 대형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여주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취재진이 살펴본 전국의 지하철 역사에는 화재 상황 등에 쓸 수 있는 긴급구호품이 비치되어 있기는 했으나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에 있거나 마스크(방독면), 공기호흡기 등의 숫자가 승객 수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 보였다.
부산 1호선 연산역의 경우 정원 970명의 8량 차량이 플랫폼에 드나들지만 비상시 승객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재 대피용 마스크는 207개에 불과했다. 부산교통공사 관계자는 “화재 대피용 마스크와 방독면이 정원 대비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비치 장소도 비상시에는 숨바꼭질을 해야 할 판이다. 서울 당산역에서 만난 직장인 정모(33)씨는 지하철역 내에서 긴급구호품함을 본 적 있느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며 “전광판 같은 곳에 긴급구호용품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안내하면 좋겠다”고 답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각 역사에 비치된 화재용 마스크가 턱없이 부족하다”며 “100%까진 아니더라도 역사 이용객 평균치만큼은 확보해 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공 교수는 이어 “또 다른 문제는 착용법이 너무 복잡해서 마스크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라며 착용이 편한 신품으로 교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정우 숭실대 안전융합대학원 교수는 “안전에 관한 관점 자체가 ‘최소’가 아니라 ‘최선’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큰 사고 1건이 터지기 전 29번의 작은 사고가 발생하고, 300번의 징후가 나타난다는) 하인리히의 법칙처럼 우리도 이제 정적인 위험 요인 외에 동적인 요인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영·윤준호 기자, 인천·대전·부산=강승훈·강은선·오성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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