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의 그릇을 깨고 변화·확장하는 글쓰기[김소연의 논픽션 권하기]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김혜순 글·이피 그림
문학동네 | 440쪽 | 2만3000원
얼마 전 시와 소설을 동시에 쓰고 있는 동료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시와 산문의 경계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느냐고. 그는 전에도 자신이 쓴 소설이 너무 시적이라는 평을 받아서 좀 더 소설다운 소설을 쓰기 위해 고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 적이 있었다. 첫 책을 준비하고 있는 그가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신중함이 못내 반가웠다. 막상 그와의 대화에서는, 시와 소설의 경계에 대해서라기보다 경계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게 되었다.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그리고 그 후로도 며칠간, 나는 더 현명한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게 내내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문득 책장에서 김혜순 시인의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를 꺼내들고서, 이 책을 선물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의 마지막 챕터에 시인은 이렇게 적어두고 있다. “이것을 시라고 하면 시가 화냅니다. 이것을 산문이라고 하면 산문이 화냅니다. 시는 이것보다 높이 올라가고, 산문은 이 글들보다 낮게 퍼집니다. 이것은 마이너스 시, 마이너스 산문입니다. (…)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는 김수영의 말, 산문을 쓸 때도 자신은 시인이라는 보들레르의 말 사이의 길항을 붙들고 쓴 글입니다.”
총 179편의 시산문이 담겨있는 이 책은, 김혜순 시인의 여느 시집들보다 직접적인 언술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보다 수월하게 이해된다. 무엇보다 시원하고 통쾌한 맛이 있다. 이 책에서 유독 시인은 더 쏟아내듯 문장을 써내려간다. 더 저격하듯 문장을 써내려간다. 시인의 여느 시집들과는 확연히 다른 연료를 써서 더 비상하고 더 번져간다. 곳곳에 노여움과 회한이 배어나와서 시인의 한숨이 독자의 머리카락을 건드릴 것만 같기도 하다. 이 책의 페르소나인 ‘않아’에게 이 세계에 만연한 태만과 비정상성을 힘껏 조롱하고 야유할 권리를 부여한 듯하다. ‘않아’는 강력한 부정의 시선으로 무장돼 있지만, ‘않아’는 앓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않아’는 더 이상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시라는 외투를 벗어던지고 문을 박차고 길거리로 나선 기세로 존재한다.
미세하고 은은하기 짝이 없는 온갖 불편함들이 내내 쌓여갈 때에 나는 자주 이 책을 펼쳐 읽었다. 이피 작가의 유머러스하고 해학적인 그림들과 더불어서 이 글들은 나의 짓눌린 듯한 마음에 해방감을 주었다. 자주 페이지를 넘기며 낄낄 웃기까지 했다. ‘않아’가 나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한 팔을 들어 내 어깨에 얹고 어깨동무를 해주는 것만 같았다.
시인의 시산문집이라 문학과 시에 대한 입장을 드러내는 글들에 비중을 많이 두고 있지만, 이 세계를 이룬 거의 모든 것들을 타깃으로 삼고 가로지른다. 차별과 편견과 위선에 대해. 병든 대학과 병든 문학을 비롯해서 병든 시스템에 대해. 태연히 자행되는 폭력과 폭력인 줄도 모르는 폭력에 대해. 온갖 속물성과 온갖 위선에 대해. 그러니까 그릇된 모든 것들에 대해. ‘않아’를 통해서- ‘않아’의 수치심을 통해서- 인간의 수치심은 어떤 국면에서 오롯해지는지를 폭넓게 헤아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는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니라기보다는, 시의 장점과 산문의 장점을 결합했을 때에 어떤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실험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시산문’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발명되어야만 하는 이유이자, 시가 새로운 방식의 앙가주망(engagement, 문학이 지닌 정치적 힘)에 도전하기 위한 물꼬 트기인 셈이다. 어떤 정신은 기존의 그릇이 너무 유약하거나 너무 작아서 다 담을 수 없으므로, 새로운 그릇을 필요로 한다. 어떤 글쓰기는 시라는 국한, 소설이라는 국한, 산문이라는 국한으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장르를 자처할 수밖에 없다. 경계를 지우는 메타적 글쓰기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필연성을 얻는다. 약속을 이행하는 것보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약속을 이행하는 의지를 드러낸다는 조건.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한 문장을 옮겨본다. “자신의 시를 시 장르의 확산에 바쳐야 한다.”(164쪽) 시인은 시를 잘 쓰기를 욕망하지 않는다. 좋은 시를 쓰는 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욕망할까. 모든 시인의 욕망이 서로 다른 욕망을 갖고 있다면? 닮을 수는 있어도 같을 수는 없다면? 인간의 욕망이 얼핏 같으면서도 서로 다르므로, 인간의 개별성과 유일함이 나타나듯이 그러하다면? 그리하여 인간다움에 대한 끝없는 탐구가 이어지고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면? 인용한 저 문장에서 ‘확산’은 영토를 넓힌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경계를 지울 때까지 가장자리를 향해 뻗어나가는 방향성을 뜻하는 것이리라.
시는 애초에 그릇이 존재하지 않았다. 시대를 거듭하면서 시의 그릇은 깨지고 변화되며 확장되어왔다. 시는 고형화된 무엇이라기보다 액체와도 같았다.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시가 사라지지 않은 채 우리 곁을 맴돌고 있는 생명력을 지닌 이유이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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