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 드론 공격, 우크라 정부와 무관한 애국 세력의 경고?

이철민 국제 전문기자 2023. 5. 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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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 “시야에서 통제해야 하는 민간 드론...탑재 폭발물 제한적”
세계 최고의 철옹성 요새 크렘린, 1987년 서독 軽비행기에 이어 두 번째 ‘뚫려’

도대체 누가 왜 한 것일까. 지난 3일 오전2시반(한국 시간 오전8시반)을 지나 러시아 크렘린궁 돔에서 터진 2건의 드론 폭발 공격의 배후가 여전히 아리송하다. 러시아 권력의 핵심부인 크렘린 상공은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보호되는 요새인데, 이것이 ‘뚫린’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서방 전문가들도 의견이 갈린다.

러시아의 주장대로 우크라이나의 ‘푸틴 암살 시도’였다면, 최신 방공(防空) 시스템으로 덮였다는 크렘린 하늘이 의외로 허술해 36년 만에 또 뚫렸다는 당혹스러운 얘기가 된다.

1987년 12월 서독의 10대 소년이 몬 세스나 172 비행기가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앞 붉은 광장에 착륙하고 있다./위키피디아

1987년 12월 7일 서독의 10대 소년 마티아스 루스트는 엔진 한 개짜리 세스나 172 경비행기를 타고 핀란드 헬싱키를 출발해 크렘린의 붉은 광장에 내렸다. 루스트는 중간에 미그 전투기와 조우했지만, 러시아 조종사는 이 비행기를 ‘우호적’으로 오인했고, 몇차례 운(運)도 따라 무사히 붉은 광장의 성(聖)바실리 대성당 옆 공터에 비행기를 안착시켰다. 그는 4년 간 노동교화소에 보내졌지만, 러시아의 허술한 방공망은 망신거리가 됐다.

앞으로 우크라이나 수뇌부를 암살하고 민간인을 대량 폭격하는 것을 합리화하려는 러시아의 ‘자작극’이라는 우크라이나 정부 측 주장을 취해도, 설명은 잘 안 된다. 푸틴이 공격의 ‘합리화’ 구실을 마련하려고 러시아 국민에게 레이더와 방공 미사일로 둘러싸인 수도 모스크바의 하늘이 이렇게 허술하고, 푸틴 자신의 권부가 취약하다는 것을 보인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러시아가 그동안 민간인 지역을 대량 폭격하면서 ‘합리화’를 찾은 것도 아니었다.

이번 드론 공격에서 첫번째 것은 오전2시27분 서쪽에서 날아와 크렘린궁의 상원(上院) 돔에서 부딪혀 폭발했고, 16분 뒤인 오전2시43분에는 동쪽에서 날아와 같은 돔의 꼭대기에 달린 러시아 삼색기 부근에서 폭발했다는 것이다. 좌우에서 공격이 진행됐다.

하지만 군사 전문가들은 드론의 크기가 작고 폭발 규모가 크지 않은 점을 들어, 이 드론의 폭발물 탑재량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또 푸틴이 크렘린 궁에서 자지 않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러시아의 주장과는 달리, 처음부터 이 정도로는 “암살 테러 시도”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러시아는 4일에는 “암살 테러의 배후엔 워싱턴이 있고, 키이우는 지시받은 대로 수행했을 뿐”이라고 미국 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 대변인은 즉각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누가 왜 저질렀을까.

◇우크라이나군 드론이 수백 ㎞ 날아, 크렘린 방공망도 뚫는다?

우크라이나 군은 드론 공격 능력이 탁월하다. 작년 4월 러시아 흑해 함대의 기함인 모스크바 순양함을 드론으로 침몰시켰고, 작년 12월에는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에서 러시아 안쪽으로 600㎞ 깊숙하게 들어가 위치한 러시아의 두 공군 기지에 드론을 보내 전투기를 파괴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사 전문가들은 이번 드론은 크기가 작아 수백 ㎞를 날 수 없고, 그런 능력을 갖춘 보다 크고 정교한 드론은 러시아 방공 시스템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크렘린 주변엔 2개의 판치르(Pantsir) 방공 시스템이 있고, 드론을 재밍해서 떨어뜨릴 수 있는 크라수카(Krasukha-)-4 지상 재밍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 수 개월 우크라이나 정부의 무기 구매 평가를 도왔던 유럽의 한 군사 고문은 FT에 “우크라이나는 크렘린 주변의 보안 지역을 정교하게 비행해서 방공망을 피할 수 있는 드론을 보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4일 모스크바 크렘린궁 앞 붉은 광장에 붙어 있는 드론 비행 금지 안내판./EPA 연합뉴스

심지어 크렘린은 GPS 사용자가 자신의 위치를 다른 곳으로 착각하게끔 하는 GPS 기만(spoofing) 시스템으로 보호 받는다. 드론 공격 다음날인 4일 모스크바에서 GPS 기만 시스템이 강화되면서, 많은 시민이 택시 호출에서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

◇자발적인 우크라 애국 세력이 러시아 취약성 알리려 ‘경고성’ 공격?

미 국방정보국(DIA)의 스콧 베리어 국장(준장)은 4일 브리핑에서 “이번에 동원된 드론은 조종자가 시야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즉 민간 취미용으로 팔리는 드론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대공 시스템도 민간용을 개조한 드론 공격에는 속수무책이라는 것이 시리아와 리비아에서도 드러났다. 작은 크기라서 레이더에도 포착되지 않고 저공 비행이 가능하다.

우크라이나 군은 민간 취미용 드론을 응용해서, 살상 능력을 높이는 드론을 제조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3일 크렘린 궁 위에서 폭발한 드론은 너무 작아서, 건물을 폭파하는 능력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런던의 왕립군사연구소(RUSI)의 수석연구원인 저스틴 브롱크는 “우크라이나 측에서 만들었다면, 실제 피해를 초래하기엔 너무 조악하게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설득력 있는 ‘배후’로 등장한 것이 우크라이나 애국 세력이다. 이들 집단은 우크라이나 밖에서도 활동하며, 상당한 재력을 갖고 우크라이나 정부와는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미국 씽크탱크 CAN의 러시아 연구 디렉터인 마이클 코프먼은 “이번 공격의 목적은 러시아가 취약하다는 것과, 크렘린의 파워가 줄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즉, 이들 애국 집단이 모스크바 시내에서 드론을 조종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명백한 부인(否認)에도,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애국 집단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러시아의 국방 관련 씽크탱크 디렉터인 루슬란 푸코프도 FT에 “이번 공격이 국가가 아니라, 비(非)국가 행위자에 의해 저질러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며 “젤렌스키는 모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슬람 테러집단인 IS(이슬람국가)도 민수용 드론을 구입해서 공격용 드론을 제작했던 점을 들었다. 우크라이나에는 애국적인 자원 세력이 많아, 아마 100만 달러(약 13억 원)도 안 들었을 이번 공격의 재원을 마련하기는 어렵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5월 9일 ‘빅토리 데이’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푸틴에게, 우크라이나 자원 세력들이 보낸 ‘당혹스러운’ 선물일 수도 있다.

◇러시아 정부의 자작극?

물론 푸틴과 러시아 정부의 자작극일 수도 있다. 러시아는 온갖 기만에 매우 능하고, 우크라이나 침공 때도 “새로운 나치주의자들에 점령된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정부가 한밤중에 크렘린궁 하늘에서 일어난 드론 공격을 약 12시간 지나서야 처음 보도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보복을 자세히 다짐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일부 분석가는 러시아인들의 분노를 끌어내고 군사적 확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러시아 스스로가 꾸며냈다고 본다.

당장 푸틴의 심복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연방안전보장이사회 부의장은 “드론 공격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그 일당의 물리적 제거를 합리화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 대중의 적개심을 자아내기 위한 연극이었다면, 이 사건은 푸틴이 지난 23년 간 자신의 주위에 구축해온 강고한 안보 장치가 의외로 허술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정적 효과도 크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지지 않은 작전이 숱하다. 러시아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정부도 기만 전술에는 능하다. 2022년 9월 발트해 해저에서 발생한 독일과 러시아를 잇는 노르트스트림 가스관 폭발 사건도 온갖 설(說)만 난무할 뿐, 배후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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