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책과 지성] "임진왜란을 생각하면 부끄러워 몸을 지탱할 수 없다." 국정 최고위직이 쓴 기록문학 '징비록' 남긴 명재상

허연 기자(praha@mk.co.kr) 2023. 5. 5.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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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은 서책으로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된 유물이다. 임진왜란 전후 동북아시아의 외교 상황, 전투 기록, 백성들의 생활상까지 다루고 있는 '징비록'은 기록문학의 백미다. 당대 국정의 최고 책임자였던 영의정의 저술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다.

'징비록'이라는 책명은 '시경' 소비편(小毖篇)에 적혀 있는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유성룡은 책 제목을 지은 연유를 '징비록' 서문에서 스스로 밝힌다.

"나와 같이 보잘것없는 자가 흩어지고 무너져 내린 나라를 지키는 무거운 임무를 맡아 위기를 극복하지도 못하고 나라를 지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산골 전답 사이에서 쉬며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으니 이 어찌 임금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그때 일을 생각할 때마다 두렵고 부끄러워 몸을 지탱할 수조차 없다."

'징비록'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부분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 대한 기록이다.

31세라는 늦은 나이로 병과에 급제해 종9품에 오른 늦깎이 이순신은 출세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강하고 성품이 고상해서 생전 누구를 찾아가 자기 안위를 부탁할 줄도 몰랐고, 현세욕에 사로잡힌 잡배들과 어울릴 줄도 몰랐다.

이런 이순신을 가장 안타까워한 사람이 유성룡이었다. 그는 이순신보다 세 살이 위로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 친구였기 때문에 이순신의 자질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이후 유성룡은 수차례 이순신을 천거하다 오해를 받는다. 이때 이야기가 '징비록'에 이렇게 적혀 있다.

"조정에서 이순신을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에 오른 지 10여 년이 되도록 벼슬이 오르지 못했다. 내가 순신을 천거해 순서를 뛰어넘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자 사람들은 그가 갑작스레 승진된 것을 의심하였다."

남인이었던 이순신과 유성룡은 반대파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둘의 정치적 부침도 비슷하다.

이순신이 모함에 휘말려 수차례 해직과 복직을 거듭하는 동안 유성룡 역시 영의정 자리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복직되는 파란을 겪었다. 둘의 말로도 극적이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유성룡은 전쟁이 끝난 뒤 계속되는 모함으로 관직을 버린 후 은거하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성룡을 둘러싼 논란도 있다. '징비록'의 내용이 일부 왜곡됐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할 때 유성룡은 재평가가 필요한 큰 인물임에 틀림없다.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동시에 지닌 성품, 균형 있는 외교관(觀), 원칙을 버리지 않는 용기, 신분이나 당파보다 능력을 중시한 실용정신, 성리학자면서도 다른 이론을 배격하지 않았던 열린 자세 등은 많은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성룡의 매력이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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