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어두운 세계를 밝힐 '마지막 성냥'
시인은 디스토피아 예감하고
시는 저항하는 몸짓이자 무기
허수경·김혜순·백무산부터
김수영·김종삼·기형도까지
시인과 작품 담담하게 풀어내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현대시의 한 중력." 1989년 시 '뿌리에게'로 세상에 나온 나희덕 시인은 모성의 서정시로 수많은 독자를 만나기 시작한 뒤 세상의 복도를 걸으며 침묵, 메마름, 울분, 불가능성이란 단어를 마음에 품었고, 이제 스스로 하나의 자장을 형성했다. 나희덕 신간 '문명의 바깥으로'는 시에 관한 그의 마음을 담담하게 서술한 시론집이다.
책은 묻는다. '2000년대 이후 현대시는 무엇이고 또 어디서 오는가.' 독자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저자는 시를 '성냥'으로 은유한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말로 책의 문을 연다.
몰락과 환란의 시대를 최근 인간은 걸어왔다. 전염병으로 상실과 공포를 경험했고 전쟁과 우울이 삶의 항상적 조건이다. 나 시인은 벌거벗은 인간과 부조리한 세계를 밝힐 '마지막 성냥'은 시와 철학의 언어란 아감벤 논의에 기대어 "내가 쓴 시와 시론이 성냥팔이 소녀가 필사적으로 그어대던 성냥의 불꽃처럼 이 시대의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혔으면 하는 다급함과 간절함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나 시인의 다음 사유는 과학철학자 브뤼노 라투르로 향한다. 오늘의 세계는 '연료가 바닥난 비행기, 구멍이 난 배, 불타고 있는 집'(라투르)이다. 그런 세계에서 재난과 책임과 영향은 불공평하다. 부는 상층에 축적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울리히 벡). 이런 세상에서 문학은 공포와 불안과 슬픔과 분노와 우울에 갇혀 있다. 시인의 언어는 세상에 저항하는 몸짓이며, 시인의 몸과 언어를 통해 발현되는 것이 오늘의 문학이다.
허수경의 시 '카프카 날씨2'를 둘러싼 나 시인의 논의는 이러한 진단에 가장 맞닿아 있다. 2016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에 수록된 이 시는 '발신자: 고대의 여름/ 수신자: 현대의 겨울'로 시작된다.
시 안에서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는 '폐허'다. 경적을 울려대며 사방팔방에서 낡은 차들이 밀려 나오고, 날아가는 총알이 아이의 심장에 거꾸러지며, 그럼에도 아무도 그 심장을 거두지 않는 장면이 시에 나온다. 허 시인은 독일 뮌스터에서 활동했던 고대 근동 연구자로 고고학 발굴 작업에 참여하며 목격한 세상의 참혹을 시로 담았다. 나 시인은 허 시인 시에 관해 "폐허의 이미지를 3인칭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동적 주체로서 참여한다"고 평한다.
또 나 시인은 김혜순·백무산의 시를 돌아보면서 "시인은 디스토피아를 예감하고 감지한다. 그들의 증언과 선언과 질문과 대화는 저항의 가장 큰 무기"라고 선언한다.
나 시인은 동시대 작품과 함께 김수영, 김종삼, 기형도의 시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책에 담았다.
기형도 시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 첫 번째 문장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에 대해 나 시인은 "다가오는 어둠에 천천히 버무려지는 이 풍경에는 절망과 희망, 추억과 망각, 자연과 인간, 개인과 집단, 내면과 현실 등이 서로 교차하며 뒤섞인다. 그 대립되는 양극 사이에서 예민하게 작동하는 윤리적 감수성은 '미안하지만'이라는 말의 반어적 뉘앙스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고 썼다.
서문에 담긴 단어 '패총(貝塚)'을 특히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이 패총 같은 글들을 떠나보내며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이 책이 또 하나의 문턱 또는 매듭이 되어 한두 걸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패총은 해안과 강변에 살던 선사시대인들이 버린 조개와 굴의 껍데기가 무덤처럼 이뤄진 유적을 말한다. 절망과 우울의 더미에서 한 줌의 희망 한 알을 캐내려는 시인의 마음은 패총보다 우주보다 크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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