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특집] 여전히 유효한 100년 전 어린이 해방 선언문
[어린이날 특집 (06)] 100년 전 어린이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SNS 역할 독자담화실부터 토론대회까지…어린이들 목소리 내는 통로 기능한 '어린이' 잡지
[미디어오늘 윤유경 기자]
5월5일은 어린이날이다. 365일 중 364일이 어른의 날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어린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됐고 미디어에서도 마찬가지다. 올해는 어린이 인권운동가 방정환이 참여한 잡지 <어린이> 창간 100주년으로 국립한글박물관이 잡지 <어린이>에 대한 전시를 개최한다. 미디어오늘은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100년전 '어린이'의 모습을 <어린이>를 통해 조명해보려 한다. - 편집자주
“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어머님 아버님께 우리 어린 목숨을 좀더 뜻있게 귀엽게 사랑해 달라는 말입니다. 저는 금년 얼마 안되는 나이를 먹은 어린이입니다마는 오늘날까지 자라오는 그 짧은 동안에 저는 어른들의 무수한 비난과 권리에 눌리어 자라났습니다. 그 일례를 들어보면 이런 일이 있습니다. '어머님 돈 십 전만 주세요' '돈은 해 또 무엇하니?' '저 잡지 책을 사보겠어요' '아이고 학생이 잡지책이 무어냐 할 공부나 하지 않고'” (1928년 <어린이> 제6권 제3호, '윽박지르지만 말고 좀더 자유롭게' 이정구 어린이)
이는 어린이 인권운동가 방정환 등이 참여해 만든 <어린이> 잡지에 실린 100년 전 어린이의 목소리다. 이정구 어린이는 평소 어른들에게 무시받아왔던 자신의 일상에 대해 쓰며 '윽박지르지만 말고 좀더 자유롭게' 어린이를 대해달라고 부탁했다. 현재 어린이들이 어른들에게 바라는 점과 비슷하다.
1923년부터 발행된 <어린이>는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던 어린이들이 주체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였다. 어린이들은 주체가 되어 자신의 글과 생각을 잡지에 직접 투고하고, 활동 등을 잡지에 기록해 남겼다. '독자담화실' 등을 통해 모르는 것을 잡지를 통해 서로 묻고 답하며 소통하기도 했다. 당시 10만 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잡지의 주체로 참여했다. <어린이>는 어린이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웅변과 토론대회는 <어린이>의 인기 코너 중 하나였다. 어린이들은 대회에 참여함으로써 하나의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글로 표현할 기회를 얻었다.
100년 전 어린이들은 꽤 철학적인 논쟁도 진행했다. 제5권 제7호에선 '사업을 성취하는 데는 '지혜'가 중요한가 '성실, 근면'이 중요한가'에 대한 토론이 진행됐다. 김명준 어린이는 “이 세상 만물 중에 사람이 제일 귀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오직 '지혜'란 것이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날 문명이 하나라도 지혜의 덕이 아닌 것이 있습니까”라고 지혜 편의 의견을 말했다. 성실, 근면 편의 고영직 어린이는 “지혜는 결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요, 부지런히 배우고 정성으로 연구하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성실과 근면함은 지혜의 어머니입니다”라고 반박했다.
잡지는 다음 호에서 어린이 독자들의 투표 결과를 공개했다. “성실, 근면 편이 말을 잘했다는 편 2,844표, 지혜 편이 말을 잘했다는 편 2,843표. 이리하여 참말 이상하게도 신기하게 1표의 많음으로써 성실, 근면 편이 대승으로 판결되었습니다.”
지금의 SNS 역할을 담당한 코너도 있다. '독자담화실'은 어린이들의 의견을 잡지에 실어주는 소통 공간이었다. 독자들은 어린이 신문을 본 후기, <어린이>에 대한 질문, 다른 어린이 독자들에게 하는 말 등을 독자담화실을 통해 전했다.
개성의 주덕룡 어린이는 “어린이 11월호의 어린이 신문은 참말로 묘하고 어여뻤습니다. 요모조모로 그렇게 예쁘고 유익한 신문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라는 의견을 전했고, 경성의 서수만 어린이는 “아아 기쁜 일입니다. 어린이 신문이 참말 재미있다고 선생님이 상학 시간에 읽어주셨습니다. 집에 가니까 집에도 책이 왔는데 아버지께서 펴보시고 연달아 탄복하시면서 '참 좋은 것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방정환의 책을 읽고 후기를 남긴 어린이도 있었다. “선생님요, 담화실 구경을 시켜주셔요. 저는 방정환 선생님이 번역하셨다는 <사랑의 선물>을 주문했더니 아주 어여쁜 책이 왔습니다. 어떻게 재미있는지 참말 세계에 유명한 이야기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와 '왕자와 제비'와 '한네레의 죽음'은 어떻게 불쌍한지 저의 눈에서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습니다. 참말 그렇게 재미있는 책은 못 사 보면 후회하겠습니다” (울산 서덕출)
어린이들은 독자담화실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같이 놀러 갈 친구들을 찾기도 했다. “이번 개성에 물이 많이 나서 사람이 많이 상하였다는데 개성에 계신 우리 어린이 애독자 동무 여러분 안녕히 계신지 궁금합니다. 독자담화실에 소식을 들려주시기 바라고 있습니다”(부산 김수득, 진주 최용석, 곡산 황해생)라며 물난리에 별일이 없는 지 묻기도 하고, “백두산 백두산! 여러분 동무들 중에 금년 여름에 백두산에 가고 싶은 분이 계시면 같이 모여서 가십시다”(성진군 허수만)라며 함께 백두산에 갈 친구들이 있는 지 묻기도 했다.
100년 전 유머코드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어린이> 첫돌 호 퍽도 재미있었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모두 재미있는 것뿐이었는데 그중에 염 선생님의 글과 김억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어떻게 우스웠는지 배꼽이 떨어져 달아났습니다. 배꼽을 주운 사람은 저의 주소로 철도편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개성 송암) 이에 부산 초량동 오뚝이는 “당신의 잃어버린 배꼽이 부산에서 연락선에 올라타려고 하는 것을 내가 붙잡아서 우리 집 버들 나무에 매어 놓았으니 와서 찾아가시오”라고 답글을 보냈다.
<어린이>는 지금의 중고시장 플랫폼 '당근마켓' 역할도 담당했다. 독자담화실에는 <어린이> 창간호를 구하는 글이 실렸다. “우리 십만 애독자 중에 혹시 <어린이> 창간호부터 대정 14년(1925년) 10월호까지(통권 제1호부터 제33호까지) 파실 분이 있으면 나에게 곧 통지해 주십시오. 그러면 곧 사겠습니다.” (전주 박만년)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봐 주시오” 어린이들의 부탁
<어린이> 잡지 속에는 어린이들의 하소연과 요구도 담겼다. 이러한 소통은 당시 어린이의 발언권을 인정해주는 어린이 운동 덕분에 가능했다.
1923년 5월 발행된 '어린이 해방 선언문'에는 '어른에게 드리는 글'이 실렸는데,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봐 주시오”, “어린이를 늘 가까이 하여 자주 이야기해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해 주시오”.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해 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 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 만한 놀이터나 기관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등의 요구가 담겼다.
제11권 제9호에 담긴 '내가 아버지라면'이란 글을 보면 “나갔다 들어올 때 사탕이나 그림책이나 장난감이나 사가지고 들어오겠습니다. 아들 앞에서 담배를 먹지 않겠습니다. 좀 잘못했다고 막 두들겨 패면서 욕하지 않겠습니다. 아들한테 거짓말을 안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모든 어린이가 부모에게 바라는 내용이기도 하다.
어린이들은 스스로의 다짐과 계획을 글로 쓰기도 했다. 박화성 어린이는 '우리는 자꾸자꾸 커가는 사람'이라는 글귀를, 김소운 어린이는 '내일은 그대 차지'라는 글귀를 써냈다. <어린이>는 어린이들이 목소리를 내며 사회의 주체로 성장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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