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얘기? 이제 안할거요” 시인 김지하, 노년에 털어놓은 마지막 이야기 [BOOKS]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5. 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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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구술집 ‘김지하 마지막 대담’ 출간
김지하 시인. [연합뉴스·매경DB]
세상 사람들은 김지하 시인을 ‘타는 목마름으로’와 ‘오적(五賊)’으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사실 시인 김지하가 삶의 마지막까지 붙들었던 시는 1987년 시집 ‘애린’에 썼던 시 ‘줄탁(啐琢)’이었다.

때가 되어 달걀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병아리는 알 껍질의 한 지점을 쪼고(啐), 그와 동시적으로 어미 닭은 병아리가 쪼는 바로 그 지점을 함께 쫀다(琢).

한 겹의 껍질을 경계로 세계가 드넓어지기 위해선 세계 내부의 인간(병아리)과 우주 안에서의 의지(어미닭)의 동시적 관계가 필요하다. ‘경계 안팎의 동시적 관계’는 김지하의 사상의 줄기이자 뼈대를 이룬다.

5월 8일 ‘김지하 1주기’ 앞두고
홍용희 교수 김지하 대담 담아내
김지하 시인 1주기(5월 8일)를 앞두고 그의 대담을 담은 ‘김지하의 마지막 대담’(작가 펴냄)이 출간됐다. 홍용희 경희사이버대 교수가 2003년 이후 김지하 시인과 나눈 8번의 대화를 한권으로 꿰맨 책이다.

‘흰 그늘’로 대표되는 미학사상, ‘줄탁’을 둘러싼 변혁의 긴장관계 등 김지하의 사상을 담아내는 한편, 촛불집회에 관한 사상적 진단, 그리고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해 ‘변절자’로 비판받았을 당시의 속마음까지 거침없이 담았다.

홍용희 경희사이버대 교수가 김지하 시인과 8번 만나 나눈 대화를 담은 신간 ‘김지하의 마지막 대담’이 출간됐다.
김지하 미학사상 핵심 ‘흰 그늘’
우선 ‘흰 그늘’부터. 그의 미학은 백암(白暗) 또는 화이트 섀도우(white shadow)로 집약되는 표현 ‘흰 그늘’로 응축된다. 그는 틈에서 흰빛이 들어오는 모습을 본 뒤 ‘흰 그늘’을 하나의 통합적 사고의 집약체로 주장해 왔다.

“판소리에서는 바로 이 삭힘에서 나오는 맛을 ‘그늘’이라 하지요. 남원, 전주의 귀명창들이 ‘저 사람 소리엔 그늘이 없어’ 하면 그 소리꾼은 그만 내려와야 합니다. 그늘은 실제 이미지를 동반합니다. 악이기도 하고 선이기도 하고 맑기도 하고 탁하기도 하고···. 흰 그늘이란 저 그늘에서 초월의 아우라가 상승하는 지극한 경지를 가리킵니다.”

흰 그늘은 단어 그자체로는 ‘모순형용’이지만, 우리 미학의 핵심원리가 된다. 삶의 장애를 어떻게든 이겨내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보려는 사람이 흰 그늘에 가닿는다.

변혁사상 ‘줄탁’ 등 생생히 설명
시 ‘줄탁’은 다음과 같다.
저녁 몸속에 새파란 별이 뜬다 회음부에 뜬다 가슴 복판에 배꼽에 뇌 속에서도 뜬다 내가 타 죽은 나무가 내 속에 자란다 나는 죽어서 나무 위에 조각달로 뜬다 사랑이여 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 껍질 깨고 나가리 박차고 나가 우주가 되리 부활하리 - 김지하 시 ‘줄탁’ (1987년작)

‘줄탁’은 ‘줄탁동시(啐琢同時)’라는 불교 용어에서 왔다. 홍 교수가 ‘선생님의 시에 역설적인 이중의 통합과 반대일치의 모순어법이 관통한다’고 언급하자 김지하 시인은 말한다.

“달걀 안의 병아리가 때가 되서 깨고 나오려고 하면 한 부분을 쫀다고. 그런데 그와 거의 동시에 그 어미 닭이 귀신같이 알고 같이 쪼아. 안팎이, 생명과 영성이, 인간의 사회적 변혁과 내적 명상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 이게 줄탁이야.”

김지하 시인은 이를 두고 내부역량과 회부환경이 동시적으로 조응할 때 변혁이 가능함을 이야기한다.

촛불든 시민 에너지 격찬하면서도
“내 극좌 이미지, 좌익서 만든 허상”
2016년 온 사회를 들썩였던 촛불집회를 두고 김지하 시인은 거리의 시민에게서 사상적 의미를 추출하고 사유한다. 그러면서도 “(나의 극좌적 이미지는) 좌익 진영에서 만들어낸 허상”고 비난한다.

“예수의 갈릴리 산상수훈 대상은 프로레탈리아가 아니라 네피쉬하야(저주받은 자들)야. 이들의 바로 20대 초반의 부녀자들, 애들이었어. 예수가 이들 보고, 너희들 안에 진짜 하느님이 있다고 했어.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전야에 밑바닥 제자들의 흙 묻은 발을 씻어주면서 이들을 섬겨.” (2010년 1월)

“나는 어느 조직이나 진영에 소속된 적이 없어요. 스물세 살 때 몽양계 중도 진보로 사상 편성을 마쳤어요. 극좌와는 거리가 멀었지요. 좌익 진영에서 허상을 만든 것이지. 나는 감옥 안에서도 그들이 하는 일을 똑똑히 알고 있었어. (중략) 저희 말을 안 듣자 배신자, 변절자로 몰아 모략중상을 상시화 했어.” (2016년 10월)

홍용희 경희사이버대 교수와 대담중인 김지하 시인. [사진=도서출판 작가]
변절자·배신자 논란에 날것 비판도
‘박근혜 지지선언’ 뒷얘기도 담겨
세상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던 2012년 ‘박근혜 지지선언’에 대해 김지하 시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박정희를 지독하게 미워했지. 나를 감옥에 가두고 사형 선고까지 내렸잖소. (중략) 자기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총을 맞아 죽은 사람의 딸은 다른 사람하고 틀릴 것이다. 그것도 18년을. 그 고간이 어떠했을까. (중략) 최태민, 최순실이 저 모양으로 저렇게 붙어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지. 이제 다시는 정치 얘기 안할거요.” (2017년 6월)

1941년 전남 목포 출생인 김지하 시인은 1954년 원주로 이주해 원주중학교를 졸업했다.

1966년 서울대 미학과에서 공부했으며 1969년부터 시를 발표했다. 1970년 풍자시 ‘오적’으로 구속됐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기도 했다.

2022년 5월 8일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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