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특집] 100년전 잡지 '어린이'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어린이날 특집 (05)] 방정환 참여해 1923년 3월 창간한 어린이 잡지 '어린이' 100주년
방정환 인기·천도교소년회 연계하며 독자층 확보…일제강점기, 새 시대 주체로서 '어린이' 주목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5월5일은 어린이날이다. 365일 중 364일이 어른의 날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어린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됐고 미디어에서도 마찬가지다. 올해는 어린이 인권운동가 방정환이 참여한 잡지 <어린이> 창간 100주년으로 국립한글박물관이 잡지 <어린이>에 대한 전시를 개최한다. 미디어오늘은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100년전 '어린이'의 모습을 <어린이>를 통해 조명해보려 한다. - 편집자주
어린이 인권운동가 방정환 등이 참여해 만든 잡지 <어린이> 창간 100주년이다. <어린이>는 일제에 주권을 빼앗긴 환경에서 1923년 3월호를 시작으로 1935년 7월까지 12년간 총 122권을 냈다. 1920년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잡지는 <새동무>(1920), <신소년>(1923), <새벗>(1923), <아이생활>(1926), <별나라>(1926) 등 다양했지만 <어린이>는 당시 신문보다 더 많은 인기를 얻으며 가장 장기간 발행된, 성공한 잡지다.
<어린이>는 12면 신문 형식으로 출발했지만 1923년 9월 제8호부터 책 형식을 띠면서 일반호 26면(9·11호), 특별호 46면(8·10호)로 증면했다. 초기엔 보름마다 발행하다가 월 1회 발간하기 시작한 1924년 1월호(12호)부터는 62면으로 발행했다. 1927년 이후에는 70면을 넘어 정간할 때까지 72~98면 정도로 발행했다.
<어린이>의 꾸준한 증면은 어린이 관련 콘텐츠가 다양해지면서 호응을 받았다는 뜻이다. 방정환이 공식 편집·발행인을 맡기로 한 1925년에는 독자 수가 10만명, 1929년 64호 발간시엔 십수만명 이상으로 알려졌다. 1923~1930년 평균 발행 부수를 보면 <신여성>의 2.4배, <개벽>의 1.5배 수준이었다. '어린이'라는 근대적 개념을 정착시키는데 기여한 <어린이>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어린이 해방 분위기와 방정환 인기
현재 아동복지법에 따르면 매년 5월5일이 법정공휴일로 어린이날이고 5월1~7일을 어린이 주간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1922년 첫 어린이날은 5월1일이었다. 1919년 3·1운동 등을 계기로 어린이들을 새 나라의 주체로 존중하기 위해 방정환 등이 천도교소년회(소년회)를 조직했고 1922년 5월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했다. 1927년 5월 첫 번째 일요일로 어린이날이 변경했다가 1939년 일제 탄압으로 어린이날 행사가 중단됐다. 1946년 해방 이후 첫 일요일인 5월5일을 어린이날로 정했다.
이는 '어린이'란 존재를 처음 만든 과정이기도 하다. 방정환이 결성한 소년운동협회가 발표한 '어린이 해방선언'은 1924년 국제연맹의 어린이 권리 선언보다 1년 앞서 사실상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문'으로 어른들이 어린이를 동등하게 대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린 것', '아이', '애새끼', '사내', '계집' 등의 표현이 아니라 이들을 격식있게 부르기 위해 '어린이'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고, 어린이에게 존댓말 쓰자고도 제안했다. 방정환은 20세 이하를 '어린이'로 정의했다.
어린이날 제정과 <어린이> 창간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어린이에게 해방 공간이었다. 이를 주도하며 아동문학가로 활동한 방정환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방정환이 1921년 외국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은 <어린이> 창간 당시인 1923년 3월 이미 3판이 매진됐고, 1928년까지 2만부(10판) 이상 판매됐다. <어린이> 지면을 보면 독자들이 방정환이나 <사랑의 선물>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인 사실을 알 수 있다. 방정환은 1931년 2월호까지 편집·발행인을 맡았다.
독자와 밀착한 미디어 <어린이>
<어린이> 잡지의 주인공은 어린이 독자다. <어린이>는 방정환의 제안을 소년회에서 결정해 창간이 가능했고, '개벽사'에서 발행했다. 당시 <어린이>가 창간은 소년회 회원 모집과 연계된 활동이었다. 소년회 전국 조직 수는 1922년 61개에서 <어린이>를 창간한 1923년 167개, 1925년엔 364개까지 늘었다. 이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창구로 해당 잡지가 역할을 했고, 놀거리가 부족했던 당시 잡지가 주요 놀거리로 기능했다. 소년회를 중심으로 한 탄탄한 독자 조직은 <어린이>의 성공 요인 중 하나다.
또 다른 요인은 어린이를 학습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린이>를 보면 곳곳에서 편집 방향을 “재미있게 읽고 놀자”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어린이의 '놀 권리'를 보장하려는 노력이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이들이 새 시대, 구체적으로는 독립 국가를 꿈꿀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 없지 않다.
또 다른 성공요인, 집필진의 노력
따라서 어른의 일방적인 계몽보다는 쉬운 한글로 많은 어린이에게 문턱을 낮춰 어린이들의 소통을 활성화하려 했다. <어린이>에선 각 지역의 사투리를 공유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다양한 지역 어린이의 의사소통을 돕기 위해 마련한 코너다. 그 외에도 놀이를 개발해 제시하거나, 퀴즈, 이벤트, 질의응답, 토론 등의 장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미디어로서 <어린이>가 독자와 끈끈하게 밀착하게 만든 요인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해외 문학이나 여행지, 동화·동요, 토론·웅변 등 현대 민주시민 교육 내용도 담고 있다.
또 <어린이> 초창기에는 잡지 원고를 쓸 사람이 부족해 방정환이 다양한 필명을 쓰면서 여러 종류의 글을 실어 잡지를 유지했다. 방정환은 '소파', '잔물', '소파생', 'SP생', '몽중인', '깔깔박사', '길동무', '북극성', 'ㅈㅎ생' 등의 필명으로 <어린이>에 글을 썼다. 예를 들면 '깔깔박사'는 웃긴 이야기를 쓸 때 쓴 필명이고, '북극성'은 '길 잃은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길 바라며 탐정소설을 쓸 때 사용한 필명이다.
1931년 7월 방정환이 사망한 뒤 그와 함께 소년회 조직에 힘썼던 이정호가 편집장을 맡았다. 이정호는 <신여성> 편집에 집중하기 위해 같은해 10월부터는 신영철이 편집을 주도했다. 신영철은 독자가 중심인 잡지를 만들고자 어린이 독자의 작품을 많이 실었다.
편집진의 노력 덕에 <어린이> 독자였다가 편집장이 된 인물도 있다. 윤석중은 동요 '옷둑이'가 <어린이>에 뽑혀 어린이 독자들이 꾸미는 <어린이신문> 1회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윤석중은 22세에 '윤석중 동요집'을 내고 23세때 개벽사에 입사해 <어린이> 편집장을 맡았다. 윤석중이 편집장을 맡은 시기에는 피천득, 박태원, 주요섭 등이 <어린이>에 글을 썼다.
한편, 개벽사는 <어린이>를 보며 자란 새 독자층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중고등학생을 위한 잡지 <학생>을 발간했다. 대신 <어린이>는 대상 연령을 낮춰 쉬운 내용으로 꾸리며 '유치원동화', '유치원소설' 등을 싣기도 했다.
※ 참고문헌
박현수, 잡지 미디어로서 <어린이>의 성격과 의미
국립한글박물관은 <어린이> 창간 100주년을 기념해 기획특별전 '어린이 나라'를 5월4일부터 오는 8월20일까지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 현재 전해지는 <어린이> 120권을 조명하면서 당시 발간된 주요 잡지, 신문, 인물자료 등 325점을 소개한다.
1부 '어린이 잡지의 탄생'에선 <어린이> 편집실을 재현해 창간배경, 제작과정, 참여자 등을 소개하고 2부 '놀고 웃으며 평화로운 세상'에선 인터렉티브와 영상, 3부 '읽고 쓰고 말하는 세상'에선 잡지에 실린 문학작품과 한글의 역사 등 다양한 읽을거리를 소개한다. 최초 어린이잡지인 <붉은저고리> 창간호(1913년), <아이들보이> 창간호(1913년) 등도 전시한다.
외국인과 소통을 위해 주요 전시물 10점을 영어, 일본어, 중국어, 아랍어 등 7개 언어로 제공하고 박물관 누리집이나 SNS의 QR코드를 통해 전시유물의 원문과 다국어 번역 서비스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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