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참수-사망-이혼-참수-생존’ 비운의 여섯 왕비가 내는 제 목소리

이강은 2023. 5. 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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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한 내용과 형식의 뮤지컬 ‘식스 더 뮤지컬’

지난 3월 오리지널팀 내한공연에 이어 지난달 한국 배우로 꾸려진 라이선스 공연이 한창인 뮤지컬 ‘식스 더 뮤지컬’은 약 500년 전 영국 왕 헨리 8세와 엮인 여섯 왕비의 삶을 재구성한 팝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이다. 헨리 8세의 명성과 역사에 가려졌던 여섯 왕비가 각자의 목소리를 높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내용이다. 가부장적 관습과 여성을 소외시키는 역사 기술에 일침을 가하는 메시지도 담겨있다. 하지만 어둡거나 무겁지 않고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헨리 8세(1491∼1547, 재위 1509∼1547)가 누군가. 영국 튜더 왕가의 두 번째 왕으로 강력한 군주였던 그는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왕권 강화와 유지를 위해 아들을 바라는 마음이 강렬한 데서 비롯된 여섯 왕비와의 관계도 많은 얘깃거리를 남겼다.

첫 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은 원래 헨리 8세 형수였다. 부왕 헨리 7세가 에스파냐의 아라곤 왕국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려고 장남 아서 왕자를 아라곤의 캐서린 공주 정혼시킨 것. 하지만 병약했던 아서가 결혼한 지 몇 달 안 돼 죽으면서, 부왕 사망 후 즉위한 차남 헨리 8세는 캐서린과 결혼했다. 캐서린이 1511년 낳은 첫 아들은 몇 주 만에 죽었고, 이후에도 임신과 유산을 거듭하다 유일하게 공주 메리(훗날 ‘피의 메리’로 불리는 메리 여왕)만 남았다. 캐서린이 더 이상 왕자를 낳을 수 없게 되자 실망한 헨리 8세의 눈에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이 들어왔다. 이후 캐서린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완강히 거부하던 캐서린은 왕궁에서 쫓겨난 뒤 유일한 혈육인 메리와도 떨어져 비참하게 살다 1536년 사망했다.
헨리 8세는 가톨릭과 결별하고 성공회를 만드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앤과 결혼에 성공하지만 둘 사이 자녀는 공주(훗날 엘리자베스 1세 여왕)가 유일했다. 결국 헨리 8세 마음도 급격히 식었고, 간통죄와 근친상간죄를 뒤집어쓴 앤은 런던탑에 갇힌 뒤 1536년 참수됐다. 

그해 헨리 8세가 맞이한 두 번째 계비 제인 시모어는 궁녀 출신의 검소하고 참한 사람이었다. 1537년 헨리 8세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 에드워드(헨리 8세 뒤를 이어 즉위)를 낳았지만 허약한 체질에다 출산 후유증으로 곧 숨졌다. 헨리 8세는 큰 상실감에 빠져 3년 동안 독신으로 지내는 등 그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러다 앤과의 결혼과 영국 성공회 탄생에 크게 공헌한 크롬웰의 제안에 1540년 독일 뒤셀도르프 클레베(페) 공작의 딸 앤을 세 번째 계비로 맞는다. 새 왕비를 본 적 없던 그는 궁정화가가 보내온 앤의 초상화를 보고 반해 마중까지 나갔으나 초상화와 다른 실물을 보고 엄청 실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범한 외모 등 앤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헨리 8세는 잠자리도 거부한 채 얼마 안 가 이혼했다.

그는 앤의 시녀이자 명문가 출신으로 불린의 외사촌이었던 캐서린 하워드에 푹 빠졌다. 당시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서른 살 가까이 났다. 그러나 조숙하고 자유분방한 10대였던 하워드는 중년의 왕에게 싫증을 느끼고 정부들과 밀회를 즐겼다. 이 사실을 안 헨리 8세는 분노해 그녀의 정부들을 중형에 처하고, 하워드를 참수했다. 왕비가 된 지 2년 만인 1542년의 일이다.  

또다른 왕비 감을 찾던 헨리 8세는 이듬해 왕실의 가정교사였던 캐서린 파와 결혼했다. 파는 이미 두 차례 결혼한 전력이 있고,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지만 헨리 8세를 위해 마지막 왕비가 되는 길을 택했다. 왕과 다른 왕비가 남긴 자녀를 잘 돌보는 등 헨리 8세가 죽을 때까지 왕비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식스 더 뮤지컬’ 공연의 한 장면. 아이엠컬처 제공
‘식스 더 뮤지컬’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동문인 토비 말로우(29)와 루시 모스(〃)가 이들 6명 왕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야기다. 특히 비욘세, 아델, 아리아나 그란데,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 21세기 팝스타들에게서 영감받아 여섯 명 왕비를 재탄생시킨 이 작품은 2019년 영국 웨스트엔드, 2020년 미국 브로드웨이에 선보이며 크게 주목받았다.

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부터 마지막 계비인 파까지 비운의 여섯 왕비가 각각 ‘이혼-참수-사망-이혼-참수-생존’ 순서대로 무대 앞에 나와 ‘누가 더 비참한 삶을 살았는지’를 겨룬다는 내용은 물론 강렬한 사운드의 음악과 함께 배우들의 시원 시원한 가창력이 일품인 콘서트 형식이 참신하다. 관객들이 공연 내내 흥에 겨워 몸을 들썩이게 한다. ‘식스 더 뮤지컬’ 넘버(노래)는 제75회 토니어워즈 최우수 음악상을 수상하고, 브로드웨이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빌보드 캐스트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지난 3월 오리지널팀의 한국 초연도 좋았지만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은 자막을 보느라 충분히 즐길 수 없었던 게 아쉬웠다. 하지만 곧이어 우리 배우들이 한국어로 바꿔 선보인 공연이 그런 아쉬움을 지워버렸다.   
지난달 내한해 한국어 공연을 관람한 말로우와 모스도 “영국의 낯선 역사를 한국의 관객들이 모르거나 아예 관심을 갖지 않을까 봐 걱정했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농담 섞인 대사에 관객들이 웃는 모습을 보며 너무 행복했다”며 “(한국 배우들에 대해) 이들이 선보이는 공연을 보는 내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배우들”이라고 극찬했다.

헨리 8세와 결혼 생활이 가장 길었던 ‘아라곤(캐서린)’ 역은 손승연과 이아름솔, 국교를 바꾸면서까지 결혼에 성공한 ‘불린’ 역에는 김지우와 배수정, 헨리 8세가 유일하게 장례식을 치러준 ‘시모어’ 역은 박혜나와 박가람, 절차를 밟아 무리 없이 이혼한 ‘클레페(앤)’ 역은 김지선, 최현선, 가장 어리면서도 헨리 8세를 푹 빠지게 한 ‘하워드’ 역은 김려원과 솔지, 왕의 마지막을 지켜 본 ‘파’ 역은 유주혜, 홍지희가 각각 맡았다. 다음달 25일까지 서울 강남구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공연된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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