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의 ‘재난 3부작’이 애도를 표하는 방법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2011년 3월11일 일본 도호쿠(동북부) 태평양 연안에서 발생한 거대 지진은 일본인들의 많은 것을 바꿔버렸다. 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이어진 재난은 일본이 자신한 안전 신화를 완전히 무너뜨렸고 부모를, 자식을, 연인을, 형제를 잃은 이들의 마음을 붕괴시켰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 사회가 나를 지켜주지 못하리란 절망까지…. 지진으로 보금자리를 잃고 타향을 떠도는 이들에게도 재난은 현재진행형이다.
일본 영화 최초로 국내에서 500만 관객을 동원한 《스즈메의 문단속》의 주인공 스즈메(하라 나노카)는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자다. 신카이 마코토가 연출한 이 작품은 그의 전작 《너의 이름은.》(2016), 《날씨의 아이》(2019)와 묶여 재난 3부작이라 불린다. 7년 가까이 신카이 마코토는 한 가지 테마에 천착해온 셈인데, 그는 왜 이토록 이 화두에 집중할까.
비극을 치유하는 그만의 대답
영화는 시대의 반영이다. 창작자가 특정 시대를 통과하며 온몸으로 느낀 감정이 작품을 통해 발화되곤 한다. 신카이 마코토가 그렇다. 소설로 나온 《스즈메의 문단속》 작가 후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38세 때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내가 직접 피해자가 된 건 아니었으나 그 일은 40대를 관통하는 일상을 지배하는 선율이 됐다. (중략) 왜, 어째서 왜, 그 사람이 왜, 내가 아니라 이대로 끝인가? 이대로 도망칠 수 있을까? 계속 모르는 척하고 살 수 있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신카이 마코토의 재난 3부작은, "어떻게 해야 하지?"에 대한 그만의 대답이다. 망각할 수 없는 비극을 치유하는 데 애니메이터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결과물인 셈이다. 물론 사회적 트라우마를 영화로 옮기려는 결심엔 여러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자칫 재난을 상업에 이용한다는 비난이 있을 수 있고, 살아남은 자들의 트라우마에 더 큰 상처를 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할리우드 창작자들이 그들 나라에 트라우마를 안긴 9·11 사건을 두고 한동안 침묵한 것도, 이를 이야기하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사회적 비극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엔터테인먼트로 옮기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신카이 마코토는 이 고민을 초반엔 '은유'로 풀어냈다. 재난 3부작의 시작인 《너의 이름은.》은 도쿄에 사는 소년 타키(가미키 류노스케)와 시골에 사는 소녀 미츠하(가미시라이시 모네)의 몸이 뒤바뀌면서 발생하는 해프닝으로 출발한다. 《체인지》(1996)와 《시크릿가든》(2010) 등이 사용한 영혼 체인지를 내세운 성장 멜로인 척 시치미 뚝 떼고 달리던 영화는, 미츠하가 3년 전 혜성 충돌로 죽은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낸다. 혜성 충돌이 가져온 재앙은 짐작하겠지만, 동일본 대지진과 나가사키 피폭의 은유다.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아는 대로다. 재난에 휩쓸린 한 명 한 명을 기억하겠다는, 그리고 시간을 달려가서라도 구해 내겠다는 희망의 메시지에 일본에서만 1800만 관객이 응답했다. 이 정도 흥행을 설명하려면 단순히 영화적 완성도나 재미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그 사회에 깔린 무의식과 접속하지 않고는 이루기 힘든 성과이니 말이다.
아이들의 희생을 방조하지 않는 것
《너의 이름은.》 에필로그에서 타키는 "도쿄도 언젠가 사라질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 가정을 펼쳐낸 게 차기작 《날씨의 아이》다. 가출 소년 호다카(다이고 고타로)가 기도를 통해 비를 그치게 하는 능력을 가진 소녀 히나(모리 나나)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날씨의 아이》에서 도쿄는 비가 그치지 않는 이상기후에 시달리고 있다. 신카이 마코토 작품에서 비는 낯설지 않다. 그는 《언어의 정원》(2013)에서 비(뿐 아니라 대기의 청량함과 하늘의 푸르름)를 시적으로 표현해낸 '날씨의 남자' 아닌가. 그러나 《언어의 정원》의 비와 《날씨의 아이》의 비는 엄연히 다르다. 전자가 주인공들의 서정성을 전달하는 매개가 됐다면, 이상기후로 표현된 후자는 무언가에 짓눌려 있는 일본 사회의 불안을 암시한다.
이러한 불안감은 《날씨의 아이》가 《너의 이름은.》과 차별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랑에 빠지는 소년과 소녀, 초자연적인 현상, 재난을 막을 기회, 일본 전통 신앙 등의 설정은 《너의 이름은.》과 유사하지만, 분위기가 다르다. 전반적으로 서늘하달까.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부터가 그렇다. 가출 후 PC방 등을 전전하는 호다카와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나이도 속이고 생업에 뛰어든 히나는 사회안전망이 닿지 않는 곳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 재난 3부작에서 《날씨의 아이》의 위치는 약간 삐죽 튀어나와 있는데,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문제의식이 '재난'으로만 한정되기엔 복잡하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이라는 밑그림을 지우고 보면 누군가에겐 영화가 도발적으로 보이기도 할 테다.
소년과 소녀가 힘을 합쳐 기적을 이뤄낸 《너의 이름은.》과 달리, 《날씨의 아이》는 아이들에게 기적을 이루려면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으라는 주문을 한다. 히나만 희생하면, 세상은 행복해지리라. 이것은 옳은가.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신카이 마코토에겐 아니었던 듯하다. 어른들 잘못으로 초래된 비극을 아이들 희생으로 막아내려는 것이라면, 더욱더.
어른의 세계에서 '한 사람'을 살려낸 호다카의 선택을 두고 실제로 의견이 엇갈린 게 사실. 그럼에도 영화는 일본에서 다시 1000만 관객을 동원했는데, "관객들의 의견을 관찰하고, 관찰을 통해 다음 영화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고 한 신카이 마코토의 말을 떠올려보면 이런 대중의 호응은 차기작 《스즈메의 문단속》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용기를 주지 않았을까. 이번엔 동일본 대지진을 은유가 아닌 정면으로 다뤄보자는, 용기를.
진정한 애도의 시작은 기억에서부터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해를 부르는 문을 닫기 위해 일본 전역을 오가는 소녀 스즈메와 청년 소타(마쓰무라 호쿠토)의 이야기를 로드무비 형식으로 그린 작품이다. '장소를 향한 애도'가 작품의 출발이었다고 신카이 마코토가 밝혔듯, 스즈메가 밟아가는 장소와 그 장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영화에서 중요하다. 규수의 작은 마을에 사는 스즈메가 의자로 변한 소타를 따라가다가 처음 닿은 곳은 시코쿠 서부에 위치한 에히메현. 에히메현은 2018년 280명 가까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호우 재해를 겪은 곳으로, 스즈메는 이곳에서 따뜻한 숙소를 제공한 동갑내기 치카(하나세 고토네)를 만나 친구가 된다.
그러나 이곳에 잠재돼 있던 재난의 문이 열리고 스즈메와 소타는 이를 닫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이 영화의 흥미로운 설정은 문을 닫기 위해선 반드시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재난에서도 알 수 있지만, 어떤 비극이 일어났을 때 일부 사람은 그것을 빨리빨리 덮고 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 애도는 충분히 이뤄질 수 있을까. 《스즈메의 문단속》은 충분히 치유하려면, 충분히 기억해야 함을 보여준다. 소타와 스즈메가 문을 닫으며 외치는 주문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돌려드립니다!"
에히메현의 재해를 막은 스즈메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루미 아줌마(이토 사이리)의 차를 얻어타고 향한 곳은 고베다. 고베는 6434명이 사망하고 재산 피해만 10조 엔에 달했던 고베 대지진(일본에선 한신 이와지 대지진으로 부른다)이 발생한 곳이다. 상흔을 안은 이 도시엔 오래전 문을 닫은 놀이공원이 있다. 많은 이의 기억이 저장돼 있는 장소에서 스즈메는 문밖으로 삐져나오려는 재난에 맞서 다시 외친다. "돌려드립니다!"
그렇게 문단속에 성공한 스즈메가 도쿄를 거쳐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 신카이 마코토로 하여금 재난 3부작을 만들게 한 지역. 후쿠시마, 미야기, 이와테현이다. 앞선 지역에서, 그 지역 사람들의 기억을 불러들였던 스즈메가 이곳에서 할 일은 과거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는 일이다. 어린 나이에 재난으로 엄마를 잃고 방황하던 어린 자신을 스즈메는 그렇게 보듬고 위로한다. 이때 스즈메가 여정에서 만난 차카와 루미는 그녀의 미래가 된다. 재난을 딛고 일어선 미래가.
제목 그대로 문(門)이라는 장치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 영화에서 문은 '열고, 닫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매일 아침 많은 이가 문 앞에서 하는 말.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며 자주 하는 말.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비극 앞에 "다녀오겠습니다"는 수신 받지 못한 채 진짜 문을 닫아버린다. 영화가 세상을 살다간 무수히 많은 이의 인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낼 때,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인사 영상이 흐르는 동안 영화는 그렇게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살아낸다. 잊지 말라는 듯.
그렇다면, 물을 수 있는 질문. 재난 앞에서 영화는,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신카이 마코토가 최근 한 뉴스에 나와 한 말이 좋은 해답이 될 듯하다. "제 딸이 12세인데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던 해에 태어났거든요. 그 재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죠. 제 딸처럼 재해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는 세대들이 일본엔 점점 늘어나고 있고요. 그런 젊은 세대와 저처럼 재해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어른 세대를 영화라는 매개체가 이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어떤 영화는 그래서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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