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의 꿈을 이룬 김민재, 나폴리의 33년 한도 풀렸다
경상남도 통영이 고향인 故 박경리 선생은 자신의 저서인 <김약국의 딸들>에서 통영을 ‘조선의 나폴리’로 묘사했다. 오랫동안 남해 바다를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통영은 수많은 섬과 곶, 만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절경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통영은 한국 축구에서도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인구 12만1600여명의 이 작은 도시에서 김호, 김호곤, 김종부, 김도훈 등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거물들이 무더기로 배출됐다. 그리고 또 한 명, ‘괴물 수비수’ 김민재(27·나폴리)도 있다. 유럽에서 성공 신화를 쓰고 있는 그가 진짜 나폴리에서 한국 축구 역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새겼다.
나폴리는 5일 이탈리아 우디네의 다키아 아레나에서 열린 우디네세와의 2022~2023 이탈리아 세리에A 33라운드 경기에서 1-1로 비겼다.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가다 후반 7분 터진 빅터 오시멘의 골로 경기를 원점으로 돌린 뒤 끝까지 균형을 놓치지 않았다.
리그 종료까지 5경기를 남겨둔 가운데 승점 80점을 확보한 나폴리는 2위 라치오(승점 64점)와 격차를 16점으로 벌리며 남은 결과에 상관없이 리그 우승을 확정했다. 팀 역대 3번째이자, 디에고 마라도나가 뛰던 1989~1990시즌 이후 33년 만에 거둔 쾌거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나폴리로 이적한 김민재도 이적 첫 시즌부터 우승을 경험하는 기쁨을 맛보게 됐다. 이탈리아 세리에A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독일 분데스리가, 프랑스 리그1과 함께 유럽 5대리그로 꼽힌다. 한국 선수가 유럽 5대리그에서 주축 선수로 뛰며 우승한 것은 2010~2011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에서 뛰던 박지성 이후 12년 만이며, 수비수로는 최초다. 정우영(프라이부르크)이 바이에른 뮌헨(독일)에서 뛰던 2018~2019시즌 우승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당시 정우영은 1경기 교체 출전에 뛴 시간도 3분 남짓에 불과했다. 현재 한국 축구의 상징인 손흥민(토트넘)도 해보지 못한 리그 우승을 김민재는 이적하자마자 경험하게 됐다.
이탈리아는 지역 감정이 한국 이상으로 심한 국가로 유명하다. 특히 부유한 북부와 가난한 남부의 갈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코로나19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던 2021년에는 당시 북부의 롬바르디아 주지사였던 레티치아 모라티가 경제기여도로 백신을 배분하자는 말을 했다가 공분을 사기도 했다.
나폴리는 남부의 중심 도시다. 그래서 북부로 원정을 가면 심한 모욕을 당해야 했다. 특히 유벤투스나 인터 밀란, AC밀란 같은 팀을 상대로 원정을 가면 ‘이탈리아의 하수구’ 같은 소리까지 들었다. 지금까지 이탈리아 남부를 연고로 하는 팀이 세리에A 우승을 한 것은 칼리아리와 나폴리 뿐이다. 나폴리에 와 우승컵을 안겼던 마라도나를 나폴리 시민들이 예수와 같은 반열에 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김민재가 이 곳에 온 것은 어찌보면 운명이었다. 지난 시즌 3위를 차지한 나폴리는 시즌 후 유럽 최고 중앙 수비수 중 한 명이자 ‘나폴리의 왕’으로 까지 불렸던 수비의 핵 칼리두 쿨리발리(첼시)를 떠나 보내며 수비진에 큰 공백이 생겼다. 페네르바체(튀르키예)에서 자신의 기량을 증명한 김민재일지라도 나폴리 팬들이 의구심을 가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김민재가 이적한 리그는 수비가 강하기로 소문난 세리에A였다.
김민재는 이적 후 한 달 만에 이런 주위의 평가를 호의적으로 돌려놨다. 특히 초반 레이스에서 가장 중요했던 7라운드 AC밀란 원정에서는 후반 추가시간 누가 봐도 골이라고 생각됐던 브라힘 디아스의 헤딩슛을 발로 막아낸 뒤 포효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초반부터 엄청난 활약을 한 김민재는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이달의 선수’에 선정됐다. 첼시로 떠난 쿨리발리의 부진이 이어지면서, 나폴리 팬들은 어느새 김민재와 사랑에 빠졌다.
승승장구하던 김민재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카타르 월드컵 후 첫 A매치였던 지난 3월 우루과이전이 끝난 뒤 그는 느닷없이 “축구도 힘들고 몸도 힘들다. 당분간은 소속팀에만 집중하고 싶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게 국가대표 은퇴설로 번지면서 직접 해명해야 했고,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손흥민을 언팔했다가 다시 복원하며 불화설까지 일었다. 나폴리가 AC밀란에 당한 0-4 완패,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8강 탈락이 전부 이 기간에 나왔다.
김민재는 다시 일어섰다. 지난달 유럽 출장에 나섰던 위르겐 클린스만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과 면담을 통해 안정을 되찾은 김민재는 지난달 24일 유벤투스 원정에서 팀의 무실점 1-0 승리를 이끌며 다시 살아났고, 결국 이번 우승 결정전까지 팀 수비의 핵으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이번 시즌 오시멘(22골·4도움)과 흐비차 크바라츠헬리아(12골·10도움)가 이끈 나폴리의 공격은 단연 일품이었다. 그리고 김민재가 이끈 나폴리의 수비도 이들 못지 않게 최고였다. 나폴리는 현재 최다 득점과 최소 실점에서 모두 1위를 질주하고 있다. 공수의 완벽한 밸런스는 나폴리가 흔들리지 않고 우승까지 갈 수 있었던 큰 원동력이 됐다.
이탈리아 매체 ‘풋볼 이탈리아’는 나폴리의 우승 확정 후 이번 시즌 평점을 매기며 김민재에게 팀내 2번째로 높은 9점을 줬다. 그리고 “이번 시즌 최고 선수 중 한 명이다. 누구도 한국의 국가대표 수비수가 1년 만에 쿨리발리보다 더 큰 전설이 될 것으로 예상하지는 않았다”며 “수비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고 극찬했다.
나폴리의 우승 확정 후 나폴리 시내는 수십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몰려나와 폭죽을 터뜨리는 등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김민재는 SNS를 통해 “우리가 이탈리아 챔피언이다. 이 역사적인 순간의 일원이 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밝혔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마라도나가 나폴리의 좁은 골목길을 거닐던 시절 이후 다시 우승의 영광을 누리게 됐다. 그들은 시즌 마지막 날인 6월4일 또 한 번 거대한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나폴리는 마라도나로 인해 우승의 한, 차별의 한을 모두 풀 수 있었다. 그리고 33년이 지난 후, 한국에서 온 190㎝ 장신 수비수와 함께 다시 한 번 켜켜이 쌓인 한과 울분을 털어냈다.
윤은용 기자 plaimsto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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