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말’이 혁명적이 될 때[책과 책 사이]

이영경 기자 2023. 5. 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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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모든 책들, 저 모든 대화와 글쓰기는 내 마음에서 길을 잃었다. … 우스워져 나를 좋은 분위기로 돌려놓는 시시한 것들에 대해 얘기한다.

슬로베니아의 대표적 시인 브라네 모제티치의 자선 대표 시집 <시시한 말·끝나지 않는 혁명의 스케치>(움직씨)가 출간됐다. 시작과 끝을 알아채기 힘든 이 책은 두 시집이 양쪽 끝에서 각자 시작되어 중간에서 만난다. 앞과 뒤가 다른 한 권의 책이다. <시시한 말>은 13개국 언어로 번역되고 슬로베니아 최고 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에는 그림책 <첫사랑>(움직씨)과 <무기의 땅 아이들>(한울림어린이)이 먼저 소개됐고, 시가 번역되어 출간된 것은 처음이다.

그의 시가 늦게 찾아온 것은 그가 성소수자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LGBTQ 운동가이자 작가·번역가·편집자로 활동해왔으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붕괴 이후 벌어진 전쟁과 내전에 시달려왔던 슬로베니아에서 반파시스트 인권활동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시시한 말>에는 어린 시절 사랑을 찾아 헤맨 여정이 담겼고 금기시된 성적 실천이 솔직하게 기록됐다. 퀴어의 삶이 사회적으로 억압되어 있기에 그가 말하는 ‘시시한 것들’은 결코 시시하지 않은 것이 된다.

그것은 <끝나지 않는 혁명의 스케치>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한 카페에 입장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호모라는 이유로. 개가 된 느낌이었다” “나는 30년째 차별에 대해 말해왔고, 내 인생 전체를 희생해왔다”고 말한다. <끝나지 않는 혁명의 스케치>는 인권활동가로 일해온 시인의 정치적 면모가 담긴 산문시다.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와, 성소수자로서 느낀 외로움과 공포를 이겨내고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담겼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란 슬로건은 모제티치에 의해 이렇게 변용된다. “시시한 것이 혁명적인 것.”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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