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생존자·재일한국인, 역사가 된 삶[책과 삶]
가족의 역사를 씁니다
박사라 지음·김경원 옮김 | 원더박스 | 316쪽 | 1만9800원
박사라는 1984년 일본에서 민족운동을 하던 ‘재일코리안 2세’ 아버지와 시민운동을 하던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부를 잘했지만 친척 어른에게 “네 아비는 네가 박사나 장관이 될 거라고 하는데, 조선인은 장관이 될 수 없어” “저렇게 공부를 잘하는데 계집애라 참 안됐지”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장관이 될 수 없다면 박사가 되기로 했다. 결국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헬싱키 대학 문학부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재일 사회학자 박사라는 고모 두 명, 고모부 한 명, 큰아버지 한 명을 인터뷰해 그들의 ‘생활사’를 <가족의 역사를 씁니다>에 담았다. 박사라에게는 큰아버지와 고모가 아홉 명 있다. 그들은 1948년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뒤 한국 제주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와 새 삶의 터전을 일궜다. “우리가 매일 당연한 듯 살아가는 이 사회가 어떤 규칙, 지식, 신념 위에 성립해 있는지를 보여주면 사회학 분야의 연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역사인 동시에 사회학 연구도 될 것이다.”
그들이 기억하는 제주 4·3사건과 일본에서의 삶은 저마다 다르다. 고모부 이연규는 일제강점기에 교사였고 해방 이후 남조선로동당 당원으로 활동하다 4·3사건 직전 일본으로 도망쳤다. 둘째 고모 박정희는 4·3사건을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일본으로 밀항하다 붙잡혀 ‘동양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던 오무라 수용소에서 지냈는데, 그 생활을 “퍽 재미있고 얼마나 좋은 곳이었는지 모른다”고 회상했다.
셋째 큰아버지 박성규는 4·3사건 당시 군인들의 학살과 고문을 직접 목격했다. 일본에 건너온 뒤에는 사실상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며 동생들을 보살폈다. 넷째 고모 박순자는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본인과 사랑에 빠졌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헤어졌다. 나중에 얼굴도 모르는 일본인과 중매결혼을 했다. 글자를 모르는 괴로움은 죽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글을 알았으면 난 틀림없이 이혼했을 거야”라고 말했다.
박사라는 가족의 생활사를 통해 역사를 모두가 똑같이 기억하지 않으며 저마다의 공백이 있다고 전한다. 제주 4·3사건과 재일동포 사회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생생한 인터뷰 자체만으로 흥미로울 만하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나는 ‘우리 집의 역사’를 쓰려고 생각했을까. 처음에는 물론 나 자신을 위해서였다. 지금은 어쩌면 공백을 메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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