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 피할 수 없지만 뒤집을 수는 있다
여름이면 숲에는 진드기가 여기저기 숨어 있습니다. 동물의 피를 빨아먹는 곤충이죠. 지난해에 죽은 저희 진돗개도 진드기 때문에 고생을 엄청 했습니다. 눈도 귀도 없는 진드기의 놀라운 사냥법은 이렇습니다. 먼저 지나가는 동물의 등에 떨어질 만한 높이의 잔가지 끝에 기어 올라가 먹잇감과 마주칠 때까지 주야장천 기다립니다(몇 년이고!). 가까이 다가오는 먹잇감이 풍기는 냄새를 맡고는 툭 떨어집니다(맨땅에 떨어지면 실패, 처음부터 다시!). 다행히 동물의 털에 떨어졌다면 촉각을 동원해 미끈한 피부까지 파고듭니다. 그러곤 피부 안에 핀셋 같은 빨대를 꽂고 피를 쭉쭉 빨아먹습니다. 원 없이 피를 빨면 1밀리미터밖에 안 되던 녀석이 완두콩만 해집니다.
진드기가 만나는 세계와 인간이 만나는 세계는 전혀 다르다
진드기는 눈과 귀가 없기 때문에 사람처럼 볼 수 없고, 동물이 내는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오직 냄새를 맡고 움직입니다. 먹잇감 위에 성공적으로 떨어졌는지 실패했는지도 동물의 체온에서 발산하는 열 자극으로 압니다. 꺼슬꺼슬한 털을 지나 매끈매끈한 피부까지 갈 때는 오직 촉각만을 동원합니다. 단계마다 동원되는 감각이 다 다릅니다. 후각, 열감각, 촉각이 대상의 자극에 맞춰 작동합니다.
진드기는 진드기의 방식이 있죠. 인간과 다른 세계에 사는 겁니다. “아, 저기 맛있는 먹잇감이 오는군. 피를 좀 빨아먹어야겠어. 옳지, 더 가까이 다가와봐. 그렇지. 이제 나는 네 피를 빨아먹을 테야.”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진드기가 만나는 세계는 인간이 만나는 세계와 전혀 다릅니다.
인간도 다른 동물처럼 인간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 세계를 인식합니다. 인간이 세계를 보는 눈도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이 세계를 인식할까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 세계를 전경(Figure)과 배경(Ground)으로 나눠 봅니다. 먼저, 다음 사진을 보시죠. 이 사진에는 두 개의 중요한 대상이 등장합니다. 고양이와 의자. 언어는 따로 떨어진 대상(사물)을 이리저리 엮어서 하나의 ‘관계’로 만듭니다. 이 장면을 보고 문장을 하나 만든다면 어떻게 하실래요? ‘고양이가 의자 위에 앉아 있다’ 또는 ‘의자 위에 고양이가 앉아 있다’ 정도가 적당하겠죠? ‘고양이’와 ‘의자’라는 명사가 ‘앉아 있다’라는 동사의 주선으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고양이, 의자, 위, 앉다, -가, -에, -어 있다’처럼 문장에 들어가는 요소를 나열만 해서는 적절한 관계나 의미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문법에 맞게 배치해야 하죠.
잘하고 있는데 왜 생뚱맞게 ‘전경’ ‘배경’ 같은 낯선 얘기를 하냐고요? 진드기와 달리,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외부 세계를 전경과 배경으로 분리해 인식한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어떤 장면을 볼 때, 우리는 그걸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게 아닙니다. 어떤 건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전경)으로, 어떤 건 부수적 역할(배경)을 하는 것으로 봅니다.
오리가 보이면 토끼는 안 보이고
천장에 파리 한 마리가 앉아 있으면 우리 시선은 그 파리에 고정됩니다. 천장에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앞에 앉은 사람의 뺨에 밥풀이 붙어 있으면, 우리 시선은 그 밥풀에 고정되죠. 언어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외부 세계를 주도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으로 보려는 경향은 문장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전경은 주로 주어로 표현되고, 배경은 부사어로 표현됩니다. ‘천장에 파리가 앉아 있다.’ ‘오른쪽 뺨에 밥풀 붙었어.’ 이걸 어기면 문장이 어색해집니다. 처음에 보여드린 장면을 보고 ‘의자가 고양이 아래에 있다’는 문장을 썼다고 해보죠. 사람들은 이런 문장을 쓰면 표현이 좀 이상하다고 느낍니다. 배경을 주어로 삼으니 낯설게 되죠.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렇게 보면 ‘오리’고 저렇게 보면 ‘토끼’인 그림 말입니다. 보통은 다양한 관점(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자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점은 이 그림을 오리로 보면 토끼는 안 보이고, 토끼로 보면 오리가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전경과 배경이 뒤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나는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테야’ 각오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오리와 토끼를 동시에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게 인간이 세계를 보는 본능적 성향입니다. 그 성향은 말에, 특히 문장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많은 사람이 글의 내용을 ‘팩트’(사실)와 ‘의견’으로 구분하더군요. 글을 쓸 때도 우선 자신이 겪은 일을 ‘객관적’으로 쓴 다음에, 거기서 얻은 느낌이나 교훈 같은 ‘주관적’인 것을 뒤에 배치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모든’ 문장은 시점(視點, 관점)을 갖습니다. 팩트를 기술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사건도 시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사뭇 다르게 표현됩니다. 대표적인 예를 보여드리지요.
논리적으로 같은 문장, 시점으로 다른 문장
경찰이 강도를 잡았다.
강도가 경찰한테 잡혔다.
논리적으로 봤을 때, 두 문장은 같습니다. 경찰이 강도를 잡았다면 당연히 강도가 경찰에게 잡힌 겁니다. 하지만 두 문장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경찰’을 주어로 쓰면 경찰의 주도적인 면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강도’를 주어로 쓰면 실제로는 체포당하는 것이지만, 강도에게도 모종의 주도성이 있을 것만 같아집니다(그래서 경찰을 숨기고 ‘강도가 잡혔다’라고만 쓸 수 있습니다). ‘경찰’을 주어로 시작하는 문장을 썼다면 다음에 이어질 문장이 어떠할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강도’가 주어인 문장은 이와는 다른 전개를 하게 될 겁니다. 강도 얘기를 더 하겠죠.
우리는 어떤 장면이나 대상에 일정한 태도와 거리감(친밀감)을 갖습니다. 모든 글에는 글쓴이의 시점이 반드시 반영됩니다. 시점이 없는 문장은 없습니다. 누구의 시점으로 그 사건을 기술하는 게 가장 적절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무조건 ‘나’의 시점을 고집해선 안 됩니다. 교통사고를 겪었다면 그 사건의 당사자인 ‘나’뿐만 아니라 동석자, 피해자, 또는 길 가던 목격자, 보험사 직원, 경찰관의 시점에 따라 문장은 달라질 겁니다. 심지어 차의 눈으로 쓸 수도 있을 겁니다.
국어 시간에 소설을 읽을 때면 선생님이 ‘시점’ 얘기를 자주 하죠. 1인칭 관찰자 시점, 1인칭 주인공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글을 쓸 때도 자신의 시점을 정해야 합니다. 시점은 1인칭으로 쓰느냐 3인칭으로 쓰느냐, 둘 중 하나입니다(소설을 쓰지 않는 한, 모든 등장인물의 내면까지 다 아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문장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자, 다음 사진을 보시죠. 이런 장면을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아마 이렇게 쓸 겁니다.
책상 위에 책이 있다.
좋습니다. 이게 가장 자연스러운 문장이죠. 관찰자(글쓴이)는 드러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사건만 표현되죠. 이렇게 쓰는 게 3인칭 시점입니다. 다음 문장처럼 1인칭으로 쓰는 분도 있겠네요.
나는 책상 위에 있는 책을 본다.
3인칭 시점과 1인칭 시점의 차이가 느껴지죠? 3인칭 시점에서 ‘나’(글쓴이)는 무대 밖에서 관찰자처럼 바라볼 뿐, 문장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1인칭은 ‘나’가 개입됩니다. 눈앞에 벌어지는 장면에 내가 연루되는 거죠. (첫 번째 보인 문장을 ‘표준적 관점 배열’이라 하고, 두 번째 문장처럼 쓰는 걸 ‘자기중심적 관점 배열’이라 하는데, 말이 어렵네요. 그냥 넘어갑시다.)
내 몸에 타인의 시점을 초대하는 ‘감정이입’
글을 쓸 때 ‘내’가 무대에 함께 오를지, 무대 밖에서 구경꾼으로 바라볼지를 택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네요. ‘누구의 시선으로 서술하느냐’는 글쓰기에서 핵심 요소입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니 내 입장에서 서술한다고만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자기 시점(관점, 자리)만 고집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든, 물건이나 동물이든) 타자의 시점을 갖도록 노력하는 게 글쓰기에는 더 도움이 되더군요.
감정이입은 내 몸에 타인의 시점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눈으로 이 세계를 보고 있나요? 오직 자신의 눈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은가요? 타인의 자리에 앉아봐야 자기 자리를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만이 사물의 시선으로 문장을 빚어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독자 우영미님의 글에 있는 ‘사진은 엄마처럼 늙어가는 나에게 이젠 울어도 된다고 말한다’라는 문장처럼요.
시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글의 방향, 주제, 느낌, 강조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글이란 게 참 묘하군요. 문장에는 이 세계를 전경과 배경으로 나눠 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 드러나는데, ‘새로운’ 문장은 그 자연스러운 본능을 거스를 때 튀어나오니 말입니다. 시점을 바꾸면 문장이 달라집니다. 유일한 문장은 없습니다. 최후의 문장도 없습니다. 그저 쓸 뿐.
다음 시간에는 ‘주제 잡기’에 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독자 글>
지난번 주제는 ‘감상문’이었습니다. 모두 아홉 분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다양한 소재로 글을 보내주셔서 일일이 소개해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내용도 모두 흥미로웠습니다. 글을 보낸 분들의 삶이 엿보여서 무척 좋았습니다.
소설 <행진곡>(정진님), 산문집 <말끝이 당신이다>(도희님), 남편이 찍은 강릉 남대천 사진(영미님), KBS 라디오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혜욱님), 노학자 전영애 교수의 집 ‘여백서원’(신정미),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지은님),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성진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존 윌리엄스의 테마곡(숙연님), 노래 <임진강>(정선님).
특히 귀와 가슴에만 꽂히는 음악을 글로 쓴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숙연님은 ‘간결하다, 무겁다, 한발 내딛다, 몰고 올라가다, 끈적끈적, 허우적대다’ 같은 다양한 비유로 음악 선율을 조옮김하듯이 글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에 비해 정선님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만난 모리카와씨와의 각별한 인연을 노래와 잘 연결해 <임진강>을 다시 들을 수밖에 없게 하더군요. 다른 분들의 글도 소개하고 싶지만 분량 때문에 아쉽게 이 정도로 마칩니다.
1천 자 정도의 짧은 글에는 많은 얘기를 담기 참 어렵죠.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야기 ‘하나’를 쓸 건가, 여러 개를 쓸 건가? 거듭 강조하지만 ‘하나로 깊게 말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영미님의 멋진 글에도 반 정도는 사진을 찍게 된 남편의 사연과 그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걸 과감히 덜어내고 마지막에 소개한 사진 한 장만 갖고 글을 풀어갔다면, 사진에 담긴 풍광과 홀로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를 더 자세히 담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김진해 경희대 교수·<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다음 글감으로 글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몸엔 갖가지 흉터가 있습니다. 아무리 ‘쥐면 터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귀하게 자란 사람도 크고 작은 상처가 있습니다. 그 흉터에 얽힌 사연을 써보세요. 여러 개를 쓰지 말고, 딱 하나의 흉터만 골라 써보세요. 마음의 상처, 아닙니다. 몸의 흉터입니다.
주제: 흉터
분량: 1천 자 정도
마감: 2023년 5월21일
보낼 곳: han21@hani.co.kr
*무적의 글쓰기: 20년 가까이 글쓰기 강의를 해온 김진해 교수가 ‘적도 친구로 만들고 싶은’ 무적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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