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하늘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리고 라미란의 희망('나쁜 엄마')
‘나쁜 엄마’, 괴물을 만드는 세상에 대한 치열한 대결의식
[엔터미디어=정덕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동물이 있어 그게 뭔지 아니? 사람 그리고 돼지. 돼지하면 모두가 더럽고 냄새나는 동물이하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 돼지는 똥오줌도 한 자리에서만 누고 잠도 깨끗한데서만 자. 체온을 낮추고 벌레를 떼 내려고 진흙 목욕도 자주 하고 말이야.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돼지를 좁은 우리에 억지로 가둬 놓은 거지. 결국 진흙으로 목욕을 할 수 없게 된 돼지는 자신의 똥과 오줌에 몸을 비비게 됐고 점점 더 더러워지고 난폭하게 변해간 거야. 참 가엾지 않니?"
JTBC 수목드라마 <나쁜 엄마>는 영순(라미란)의 그런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내레이션과 함께 등장한 작고 귀여운 돼지 한 마리는 초원을 질주한다. 이 돼지 이야기는 이 드라마가 갖고 있는 치열한 대결의식을 은유적으로 담아낸다. 힘이 없어 무력하게 죽은 남편 앞에서 절망하며 아들 강호(이도현)만은 힘 있는 사람으로 만들겠다며 지독하게 몰아세웠던 나쁜 엄마 진영순. 그래서 결국 그토록 원했던 검사가 되지만 알고 보니 아들은 힘없는 사람 돕는 검사가 아니라 돈과 권력을 좇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교통사고를 당해 7살로 돌아간 아들을 재활시키면서도 굳건했던 영순은 아들의 실체를 알게 된 후 무너져 내린다.
"아, 다 내 잘못이야. 불쌍한 사람들 도와주라고 해 놓고, 억울한 사람들 살려 주라고 해 놓고, 정작 내가 너를 이렇게 키운 거야. 돼지우리에 가둬 놓고 숨도 못 쉬게 하면서 맨날 공부, 공부, 공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 만들려다가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을 만들었다고, 내가." 엄마의 비뚤어진 자식 교육과 그로 인해 성공은 했어도 돈과 권력에 눈 멀어 괴물이 되어버린 아들. 영순과 강호가 마주한 비극은 7,80년대 개발시대에 지독한 교육열이 결국 만들어낸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다. 지식 권력을 잡은 속물에 괴물이 된 엘리트들에 대한.
<나쁜 엄마>는 그렇게 괴물이 된 강호가 교통사고(사고가 아닌 사건으로 보이지만)를 당해 7살 아이로 되돌림으로써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려 한다. 7살 아이가 된다는 설정 자체가 은유적이다. 마치 시간을 되돌려 다시 시작하는 '회귀물' 판타지 같은 설정이니 말이다. 강호는 그렇게 가둬진 좁은 우리에서 더러워지고 난폭하게 변해가다, 가까스로 엄마 영순에 의해 우리 바깥으로 나올 수 있게 된다. 우벽그룹 송우벽(최무성) 회장과 오태수(정웅인) 의원이 있는 세계가 그를 더럽게 만든 좁은 우리였다면, 영순이 강호를 데려온 조우리 마을은 우리 바깥으로 나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초원 같은 곳이다.
티격태격하며 부대끼고 살아가는 살아가지만, 조우리 마을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들이다. 이장(김원해)부터 정씨(강말금), 박씨(서이숙), 청년회장(장원영) 등등 모두 7살로 돌아간 강호를 서로서로 챙겨주려 하고, 그 집을 도와주려 마음을 쓴다. 이미주(안은진)의 아이들인 예진(기소유), 서진(박다온)은 7살 강호를 친구처럼 대하고 같이 놀아준다. 강호는 그 조우리 마을이라는 새로운 세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변해간다.
아들이 괴물이 됐다는 걸 알고 절망했던 영순은 그럼에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교통사고로 인해 7살로 돌아간 것이 어쩌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강호에게 말해준다. "진짜 가여운 건 말야 돼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어서 항상 땅만 보며 살아야 한다는 거야. 오직 돼지가 하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 그건 바로 넘어지는 거지. 넘어져 봐야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거야. 돼지도 우리 사람도."
송우벽이 제공하는 돈과 권력에 취해 약자들을 짓밟는 짓을 자행했던 강호는, 그 전도유망해 보였던 길 위를 달리다 드디어 넘어짐으로써 새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예진, 서진과 놀다가 잃어버린 공 하나를 찾기 위해 온 마을을 뒤지고 다닌다. 그 공 하나가 가진 소중한 가치를 알게 된 것. 결국 밤늦게까지 숲을 찾아 헤매다 휠체어에서 넘어진 강호는 그 자리에서 나무에 걸린 공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공을 예진과 서진의 집으로 가져왔을 때 거기서 이미주를 만난다. 강호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 그건 미주 같은 소중한 사람들을 향해 있다는 걸 드라마는 그렇게 공 하나의 에피소드로 들려준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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