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빈 추모하는 편지 “다음엔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세요”
조문객들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을 기렸다. 비가 내린 2023년 4월25일, 서울 삼성동 판타지오 사옥에 마련된 추모공간에 팬들은 가수가 생전에 좋아하던 진라면과 초코우유를 놓아두거나 손편지를 벽에 붙였다. 어떤 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고 어떤 이는 고인을 위해 기도했다.
“늘 웃고 있어서 몰랐어요. 얼마 전에도 힘들다고 했는데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부디 다음번에는 연예인 말고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세요. 그래서 행복해지세요.” 추모공간엔 이런 내용이 담긴 팬들 편지가 가득했다.
5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 ‘아스트로’ 멤버 문빈(25)이 4월19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998년생 문빈은 2009년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아역배우로 데뷔한 뒤 8년의 연습생 생활을 거쳐 2016년 아스트로 멤버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2023년 3월부터 그룹 멤버 ‘산하’와 함께 세 번째 미니앨범을 발매하고 전세계 투어를 진행하던 그는 돌연 죽음을 택했다. 앞서 4월11일 배우 정채율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지 열흘도 안 돼 일어난 일이었다.
살 빼려 두세 시간 걷고 주 3일 학교 빠져
외신은 두 사람의 죽음을 일제히 ‘한국 아티스트 육성의 문제점’과 연관지어 보도했다. “어린 나이부터 연습생으로 발탁돼 강력한 (기획사의) 통제 아래 놓인다”(<가디언> 4월20일)거나 “한국의 아티스트들은 자기 삶이 없어 에스엔에스(SNS) 팬들에게선 완벽한 모습을, 기획사에선 흥행을 요구받는다”(<비비시>(BBC) 4월20일) 등의 보도가 쏟아졌다. 문빈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당일 트위터엔 ‘모든 연예인이 행복하게 일하길 바란다’는 팬들의 게시글이 대거 올라오며 ‘모든 연예인’이 실시간 트렌드에 올랐다.
문빈은 사망 전 연예계 활동의 어려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는 2023년 4월8일 팬들과의 라이브방송에서 “고백할 것이 있는데 힘들었다. 티를 안 내려 했는데 콘서트 때 조금 티가 났다. 더 나아지려 노력하고 있다. 내가 선택한 직업이니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방송 뒤에도 계속 활동을 이어나갔다. 소속사 쪽은 아티스트 보호가 적절했는지에 대해 “추모기간으로 시의적절하지 않아 답변드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 아이돌 육성은 청소년기부터 시작되는 가혹한 경쟁이 특징이다. 2017년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김민규 교수팀이 전국 3191개 연예 관련 학원 수로 추정한 아이돌 연습생 규모는 최소 3만 명이다. 이 가운데 정식 데뷔하는 아이돌은 연간 40팀 남짓. 5인조 그룹으로 일괄 계산해도 데뷔율이 1%가 안 되는 셈이다.
가혹한 경쟁을 뚫는 과정에서 연습생이 과도한 외모 강박에 시달리거나 춤·노래 연습으로 학습권을 침해받는 경우도 있다. 202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행한 ‘대중문화산업 종사 아동·청소년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보면, “몸무게를 빼려고 추운 겨울에 2~3시간 걸어다녔다”거나 “어린이 프로그램 촬영으로 학교에 주 5일 중 3일을 빠졌다”는 응답이 실려 있다. 조사에 참여한 78명 응답자 중 53명(67.9%)은 15살 미만이었다.
‘주 40시간 이내·야간 활동 금지’ 어겨도
어렵게 데뷔한 뒤에도 뒤따르는 직무스트레스가 크다. 수많은 방송 스케줄과 팬미팅 등을 소화하며 자신의 실제 감정과 보여야 하는 감정의 불일치를 경험하고, 더러는 감정노동이 질환으로 악화하기도 한다. 2022년 3월 공황장애·양극성장애를 고백한 가수 송민호는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데 무엇이 나를 즐겁지 못하게 하는가 고민이 크다”고 말했다. 2021년 9월 가수 겸 연기자인 서현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음악방송에서 웃으며 노래 불러야 해 힘들었다 ”고 말했다.
연예인은 육성 과정에서 소속사의 과도한 통제에 놓이기도 한다. 2020년 1월 배우 고은아는 유튜브에서 “스타일리스트 언니와 영화를 보러 갔는데 소속사가 남자와 갔다고 오해했다. 내 휴대폰을 빼앗고 영화 내역을 확인하더니 야구방망이로 머리와 허벅지 아래를 때렸다”고 폭로했다.
연예인 심리건강 문제가 반복되자 정부도 나름대로 대안을 냈다. 정부는 2014년 청소년 예술인 권리 보호 조항이 담긴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을 만들고 2019년 가이드라인(표준부속합의서)도 발표했다. 청소년 예술인이 15살 미만이면 1주당 35시간 이내, 15살 이상이면 40시간 이내로만 활동할 수 있고 야간(오후 10시~오전 6시) 활동은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기획사는 이들의 학습권과 수면권 등도 보장해야 한다.
그러나 기획사들이 이를 어겨도 벌칙은 없으며, 실제로 이를 이행하는지 관계부처가 점검한 적도 없다. 청소년에게만 적용되는 총노동시간 규제도 국외나 장거리 이동 등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엔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 앞서 인권위 실태조사에서 응답자의 57.7%(45명)는 촬영 기간 중 하루 평균 수면시간이 ‘4~6시간’이라고 응답했다. 인권위는 청소년 예술인의 인권침해·차별에 대비한 신고 및 권리구제 절차를 마련하라고 문화체육관광부에 권고했다. 국회는 현재 관련법 개정을 논의 중이다.
정부와 기획사가 마련한 심리상담은 어떨까.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정부 예산으로 1인 최대 12회 상담을 제공하고 기획사들도 사내에 상담 창구를 둔다. 관건은 활동시간을 실제로 얼마나 쪼개어 상담에 배분할 수 있느냐다. 연예인의 직무 스트레스를 연구한 이주연 국제사이버대 특수상담치료학과 교수는 “심리상담은 꾸준히 받아야 효과가 있는데 소속사가 소극적이거나 당사자가 소문을 꺼리면 상담이 일회성에 그치기 쉽다. 연예인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쉬운 직군이라 상담 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지지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예인 의존 심한 수익구조가 착취 불러
연예인 의존도가 심한 연예산업 수익구조가 착취를 야기한다는 해석도 있다. “기획사의 수익은 연예인의 행사·공연·광고 출연료가 대부분이고 음원 저작권료로는 수익을 못 낸다. 기획사 수익이 연예인 활동에 달려 있어 과로를 야기하기 쉽다.” 김민규 교수팀이 2017년 ‘연예매니지먼트산업 실태조사 및 환경 개선 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짚은 문제점이다.
2013년 800만 장 수준이던 국내 앨범 판매량(글로벌 케이팝 음악차트 써클차트 1∼400위 기준)은 2021년 5천만 장으로 6배 이상 늘었다. 그러나 산업이 급성장한 만큼 종사자 보호책이 뒤따르진 못했다.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연예인은 근로기준법과 산업안전보건법을 적용받지 않아 산업재해 예방이나 노동시간 규제도 없는 형편이다. “과거에는 선후배들끼리 만나 고민을 터놓기라도 했는데 최근엔 기획사 중심으로 돌아가는 탓에 그러기도 어렵다. 연예인들이 심리적 위기를 느낄 때 고립되지 않도록 협회 등이 방안을 고민할 때다.” 주우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탤런트지부 지부장의 말이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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