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전쟁과 그 바깥의 전투, 尹의 기로
지난해 8월 미국 칩스법 발표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 배제
中, 마이크론 조사 나서며 반격
첨단기술 이면엔 G2 패권 다툼
미중 갈등에 ‘K-반도체’도 위기
성과 안 보였던 한미 정상회담
묘수도, 확신도 없는 K-반도체
한미 정상회담 이후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두고 다양한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그중 반도체 분야의 논의가 빠져 아쉽다는 지적이 두드러집니다. 미국의 칩스법을 돌파할 묘책도, 중국 반도체 시장에서의 입지를 지킬 만한 명분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G2 반도체 전쟁과 새우등, 첫번째 편입니다.
'바이든과 윤(윤석열 대통령)의 만남, 그 핵심에는 핵무기와 칩이 있다(Nukes and Chips at the Heart of Biden's Meeting With Yoonㆍ블룸버그)' '한국 대통령, 바이든과의 회담에서 반도체 칩과 핵 위협에 관한 보장을 요청할 것(South Koreas presi dent to seek assurances on chips and nuclear threat at Biden meetingㆍ파이낸셜타임스).' '메모리 칩이 한국 대통령의 방미를 지배하다(Memory chips dominate South Korean president's visit to USㆍ프랑스24).'
지난 4월 26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외신을 뜨겁게 달궜던 뉴스 목록입니다. 이 제목들에 담긴 함의는 간단합니다. 국제사회는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반도체 산업이 핵무기만큼이나 중요한 논의 사항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뜻밖입니다. 방미 일정을 마치고 4월 30일 귀국한 윤석열 대통령의 손엔 국내 반도체 산업의 현재를 위한 묘수도, 미래를 향한 확신도 들려있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선 아쉬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반도체칩과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ㆍ일명 칩스법)으로 반도체 업계에 위기가 닥쳤는데, 정부의 물밑 협상은 없었느냐"는 겁니다.
반도체, 칩스법, 외교, 협상…. 낯선 용어도, 익숙한 단어도 한꺼번에 늘어놓으니 어쩐지 알듯 말듯 합니다.
자! 그래서 더스쿠프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언뜻 제각각인 키워드들이 한미 정상회담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회담 종료 이후 반도체 업계에서 이런저런 얘기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해 볼까요?
■ 설명➊ 칩스법이란 = '반도체 없는' 정상회담 논란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칩스법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칩스법은 지난해 8월 미국 정부가 발표한 '반도체칩과 과학법'의 약칭입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 미국이 잡겠다!"며 야심차게 밀어붙인 법안이죠. 미국 내 반도체 생태계를 육성하기 위해 과학 산업에만 총 2800억 달러(약 376조원)를 쏟아붓겠다는 것이 칩스법의 골자입니다.
중요한 건 여기서부터입니다. 이 단순한 뼈대 위에는 반도체 시장을 넘어 세계 경제의 패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미국의 복잡한 셈법이 녹아 있습니다. 칩스법의 자세한 내용을 숫자로 표기하면서 열거해 보겠습니다.
➊ 미국의 반도체 공장에 투자하는 기업은 25%의 세액 공제를 받을 수 있다. ➋ 다만, 인센티브를 받는 기업은 미국이 지정한 '우려대상국' 내 반도체 설비 및 생산 확장을 자제한다 ➌ 우려대상국은 중국, 북한, 러시아, 이란 등이다.
➍ 이들 국가에선 향후 10년간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5% 이상 늘릴 수 없으며, 10만 달러(약 1억3000만원) 이상의 거래는 불가능하다. ➎ 구형 반도체는 10% 미만까지 생산 능력을 늘릴 수 있다. ➏ 다음과 같은 설비확장 의무를 위반한 기업은 미국 정부에서 받은 인센티브 전액을 환급해야 한다.
이쯤에서 개념 하나를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반도체는 회로가 작으면 작을수록, 층은 높으면 높을수록 '고기능 최첨단' 제품으로 분류됩니다. 소비 전력은 낮아지되, 정보처리 속도는 빨라지기 때문이죠.
이 기준에 따라 첨단 반도체에는 회로가 작은 28나노미터공정(㎚ㆍ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 미만의 로직 반도체, 18나노공정 D램과 층수가 많은 128단 이상의 낸드플래시 등이 포함됩니다. 반대로 18나노공정을 초과하는 D램, 128단 미만의 낸드플래시는 구형 반도체에 해당하고요.
공급망서 중국 배제하는 칩스법
자! 다시 칩스법으로 돌아와볼까요?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건 우려대상국에 '중국'이 포함돼 있다는 점입니다. 중국은 세계 최대 반도체 소비국 중 하나입니다. 미국의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글로벌 반도체 소비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4% 남짓으로, 미국(25%)에 이어 두번째로 '큰손'이죠.
어디 이뿐인가요? 인천연구원은 지난해 11월 발표한 보고서(중국 반도체 산업의 발전현황과 시사점)에서 "지난 10년간 중국 반도체 시장의 연평균 성장률은 20%를 뛰어넘는다"고 분석했습니다.
■ 설명➋ 미국 vs 중국 = 보시다시피 반도체 업계에선 중국이 '신흥 시장'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칩스법은 중국이란 큰 시장을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조치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엔 중국을 향한 미국의 위기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지난 20여년간 미국과 중국은 상호의존적인 경제구조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원자재, 정보ㆍ통신, 보건 등 미국 경제의 핵심 분야에서 중국 의존도가 20%를 넘어서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론 미국 기업이 달성한 전체 매출의 5%가 중국에서 발생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됐죠(한국무역협회ㆍBCG).
이는 미국 산업 전반이 중국발 공급 변수에 취약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원자재 공장, 부품 공장, 물류ㆍ유통 시장 중 어느 한곳에서 '삐끗'하기만 해도 다수의 미국 기업이 줄줄이 휘청일 수 있다는 거죠. 미국 입장에선 중국 의존도가 더 높아지기 전에 이런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당장 중국의 영향력을 지워내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선택한 길이 바로 '기술 통제'입니다. 반도체처럼 중국이 성장세에 있는 첨단기술 분야에 제재를 가해서 미국이 쥐고 있는 국제질서와 경제의 주도권을 방어하겠다는 전략이죠. 미국이 칩스법으로도 모자라 지난해 10월 반도체 장비 제조사들의 '중국 판매'를 금지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입니다.[※참고: 우리나라 기업들은 이 규칙의 적용을 1년 유예 받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뒷부분에서 풀어보겠습니다.]
올 3월 국제금융센터(KCIF)가 펴낸 보고서(미중 기술갈등의 글로벌 경제 영향 및 시사점)에도 미국의 이런 노림수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KCIF는 보고서에서 "중국은 기술경쟁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의 육성을 위해 노력했지만, 자급률이 17%로 목표치(70%)를 크게 하회했다"면서 "미국의 정밀 견제에 따른 첨단산업 부문의 피해 확산이 우려된다"고 진단했습니다.
이 사실을 토대로 보면, 미국의 칩스법은 다음과 같이 쉽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중국 반도체 시장이 너무 커져서 안 되겠어. 이제는 견제가 필요해. 자, 능력 있는 반도체 기업들은 중국 말고 미국에 와서 사업하는 거 어때? 대신 우리가 세액 공제도 해주고, 여러 가지 필요한 투자금도 지원해줄게. 이게 바로 우리가 마련한 칩스법이야."
미국 기업 옥죄는 중국의 반격
하지만 가만히 당하고 있을 중국이 아닙니다. KCIF의 보고서 내용을 좀 더 살펴볼까요? "미국의 견제가 거세질 경우 중국은 핵심품목 수출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미국 기업 블랙리스트 선정, 국채 매도 등 다양한 보복에 나설 것이다."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지난 3월 31일 중국 정부는 미국의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이하 마이크론)를 향해 칼을 빼 들었습니다. 중국 당국은 "마이크론의 중국 내 판매 제품을 대상으로 인터넷 안보 심사를 실시하겠다"면서 "제품에 잠재한 문제가 인터넷 안보 위험을 일으키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나름대로 명분이 있어 보이지만, 외신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미국 언론 뉴욕타임스는 4월 4일자 기사에서 "중국이 마이크론 심사에 착수하기로 한 건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산업에 전면적인 제한을 가한 뒤"라면서 "업계 전문가들은 이를 (중국이) 미국 기술정책 입안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죠.
아울러 뉴욕타임스는 샘 색스 예일대 로스쿨 선임연구원의 인터뷰를 인용해 "마이크론의 사례는 중국이 외국 기업에 보내는 경고의 뜻이기도 하다"고 분석했습니다. 중국이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에 "미국 편에 서면 우리나라에서 사업 못 할 수도 있다"는 시그널을 울렸다는 거죠.
■설명➌ 미중 갈등 여파 = 문제는 미국과 중국의 '기술 갈등'이 전세계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안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KCIF는 "첨단기술의 안보화로 미국 중심의 선진국과 중국ㆍ러시아 중심의 신흥국 진영 간 기술장벽이 형성됐다"면서 "이로 인해 국제표준도 분산되면서 연간 1조 달러 이상의 기회비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여기에 지정학적 리스크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KCIF는 미국과 중국의 기술대립이 반도체 및 첨단부품 제조 중심지인 '대만'을 둘러싼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관측했습니다.
우선 중국은 전체 반도체 수입의 38%를 대만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전세계 화물 선박의 절반이 대만해협을 통과하고 있어, 무역의 요충지로도 아주 중요한 곳이죠.
미국 입장에서도 대만은 '협력'이 필요한 국가입니다. 일단 반도체 시장에서 대만은 무려 63%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0나노 이하 첨단공정에선 대만이 차지하는 비중이 92%에 달합니다.
이는 대만이 반도체 시장에 끼치는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입니다. 미국이 꺼내든 반도체란 무기가 중국을 견제하는 데 효과적으로 쓰이기 위해선 대만의 협조가 뒷받침돼야 하겠죠?
이처럼 대만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기 위한 줄다리기 과정에서 미중 양국의 무력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일례로 중국 정부는 올해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대만 통일 의지를 크게 강조하며 3년 연속 군사지출 증가율을 끌어올렸습니다.
만약 미국과 중국의 군사충돌로 대만의 반도체 생산에 문제가 생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BCG는 전세계 기업이 나서도 대만의 반도체 생산 물량을 대체하는 데 3년 이상 걸릴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글로벌 경기가 급격히 위축되는 건 당연하고요.
이를 감안하면, 미국과 중국은 전세계 경제의 명운을 걸고 반도체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 하필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과 중국의 때아닌 '힘겨루기'가 펼쳐지고 있는 배경을 이제 좀 이해하셨나요?
지금까지 살펴봤듯, 현재 반도체 시장에는 미국과 중국이란 거대 양강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정치공학적 문제들이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미국의 칩스법으로 불거진 반도체 이슈를 '기업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민간의 영역'으로만 볼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는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후 '정부 책임론'이 불거지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G2 반도체 전쟁과 새우등 두번째 편에서 이어나가겠습니다.
윤정희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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