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전세제도'…건축사기꾼 먹잇감된 까닭은[전세사기해법은]①

최서윤 기자 2023. 5. 5.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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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급증에 무분별한 대출·빌라 난립으로 대처…초저금리 만나 집값 급등·피해 '눈덩이'
전문가들 "정책 허점 파고든 사기 수법…정부 책임 분명"
인천에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세 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모두가 '꽃다운 나이' 20·30대 청년들이다. 사진은 피해 주택 중 한 곳 공용현관문에 수사 대상지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부착된 모습. 2023.4.17/뉴스1 ⓒ News1 정진욱

(서울=뉴스1) 최서윤 기자 = 2012년. 인천 미추홀구에서 무더기로 발생한 전세사기 피해 주택 중 가장 오래된 '빌라'의 준공 연도다. 통상 빌라를 지을 때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일으켜 건축 후 준공해 입주까지 최소 6개월은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해당 빌라의 건축 유인(아직 입증되진 않았지만 사기를 계획한 시점)은 적어도 2011년 혹은 그보다 몇 년 전 시작됐을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2011년은 외환위기 이후 최대 규모의 '전세대란'이 발생한 해다. 2008년 미국에서 촉발해 글로벌 금융위기로 번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하우스 푸어'에 대한 공포가 커진 데다, 이듬해인 2009년 정부가 보금자리주택 공급 정책을 발표하자 주택 매매를 미루면서 전세 수요가 급등한 것이다. 마침 2008년 도입된 현재 방식의 전세대출에도 힘입어 전셋값은 고공행진을 시작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정부는 줄곧 과열되던 전세시장에 행복·안심 등 이름만 바꿔가며 '전세대출 확대'와, 도시형생활주택처럼 전세매물이 될 만한 주거 형태의 '공급 확대'로 대응해왔다. 2015년 SGI서울보증 전세대출 한도는 5억원까지 늘었고,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신축 빌라 등에 대해 공시가격의 150%까지 전세금반환보증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연립주택 신축 허가도 급증(전세 수요가 많은 서울 기준 전년 대비 505%)했다.

'ㅇㅇㅇ아파트', 'ㅇㅇ빌'이란 이름으로 인천 미추홀구에서,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전국 각지에서 이미 터졌거나 곧 터질 '시한폭탄'이 우후죽순 생겨난 배경이다. 화곡동 공인중개사들은 현재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대규모 전세사기 공모 위험을 감지한 시기를 2015년 전후, 본격화된 시기를 2018년 전후로 꼽고 있다.

화곡동에서 13년 이상 영업했다는 한 개업중개사는 "지금처럼 빌라 전세가 위험해진 건 적어도 2010년대부터"라며 "손님이 아니라 지인이 살고 싶다고 물어오면 우리는 보통 만류하는 유형의 집들이 계속 있었다"고 귀띔했다.

◇전세 대출·공급 확대→연립·다세대·다가구 '난립'…언젠간 터질 '시한폭탄'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빌라 밀집지역. 2023.4.21/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이후 나온 정책들은 그야말로 '불 난 데 퍼부은 기름'이 됐다. 전세대출이라면 무주택자도 90%까지 받을 길이 열렸고, 저금리에 접어들며 전세는 더이상 사글세→월세→전세→자가로 이어지는 '주거사다리'가 아닌, '은행에 내는 월세', '월세보다 싼 전세(대출이자)'로 왜곡됐다.

그러는 사이 예대마진으로 수익을 올리는 은행들은 떼일 염려 없는 정부 보증에 따라 무분별한 대출을 실행하기 바빴고, 정부는 종합부동산세 등 각종 세금으로 세수를 증대했다. (후에 전세사기 폭탄이 터지자 금융기관은 대출을 회수하기 위해 집을 경매로 던지고, 국세청은 체납 세금 회수를 위해 집을 공매로 던지기 바쁠 뿐이었다.)

전세사기꾼 일당이 건축업자, 분양업자, 공인중개사, 중개보조원들로 구성돼 감정평가사를 매수하고 '바지'임대인을 앉히며 폭탄을 크게 키울 때까지, 전문가집단인 은행의 검토도, 정책 허점을 보완해야 할 정부 기능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심지어 "건축사기꾼 일당도 임대사업자로 등록해 각종 세제혜택을 입었지만 이들의 의무에 대한 지자체의 감시는 소홀했다"고 미추홀구 한 피해자는 절규한 바 있다.

전세 사기 문제가 집중 조명된 지난해 HUG 국정감사에서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거래가 없는 신축주택의 경우 감정평가를 세입자에게 떠넘겼다. 국민 돈으로 보증을 서는 기관이 직접 확인도 하지 않았기에 이런 허점을 이용해 전세사기가 등장한 것"이라며 "박근혜·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지속됐던 대출 중심의 주거 정책에 HUG가 무리한 보증으로 호응하며 발생한 문제"라고 꼬집기도 했다.

더불어 2019년 말 코로나19 팬데믹 시작부터 2022년 봄 미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직전까지 계속된 초저금리로 인한 집값 급등과 전셋값 대란은, 터져야 하는 폭탄을 더 길게 연명시키며 피해를 눈덩이처럼 키웠다는 게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지난해 4월까지도 주요 시중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과 전세대출 금리를 인하하고, 마이너스통장의 한도를 확대하며 대출 문턱을 낮추기 바빴다. 2022.4.4/뉴스1 ⓒ News1 구윤성 기자

◇확인 없는 보증·무분별한 대출…사기꾼 일당도 임대사업자 세제혜택

물론 현재 미추홀구와 화곡동에 이어, 구리·동탄 및 서울 은평구 등지에서 밝혀지고 있는 전세사기 수법에 있어 피해자 책임도 있다는 지적도 일각에선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전세제도의 출발은 분명 '사금융'인 만큼, 전세보증금이 '남에게 무이자로 빌려주는 내 돈'이란 인식을 갖고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는 탄식도 나온다.

미추홀구 피해자 다수는 '모든 매물이 근저당권을 끼고 있어도 건물 전체가 집주인 소유라 안전하다'는 사기꾼 일당 중개사의 말을 믿은 경우가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집값 상승기 자금이 충분치 않은 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 등 입장에서 주변 시세보다 저렴한 신축 전세 매물은 솔깃할 수밖에 없고, 전세·매매 계약을 많이 해본 적 없는 청년층을 업자들이 조직적으로 작정하고 속인 측면도 있다. '건축왕 남헌기' 사건과 관련된 미추홀구 경우는 최근 터진 보증금 미반환 사태 중 가장 사기 성격이 짙은 사례로 꼽힌다.

미추홀구를 비롯해 화곡동과 구리, 동탄 등 가장 많은 지역에서 성행한 수법은 무자본 갭투기, 이른바 '빌라왕' 사기다. 세입자에게 시세보다 높은 금액으로 전세대출을 받게 한 뒤, 그 차액을 건축주-분양업자-중개사-임대인이 나눠 갖는 방식이다. 임대인은 무자본 혹은 100~200만원을 받고 집의 소유권을 취득하는데, 세입자가 나갈 때 돌려줘야 할 보증금이 시세나 제 가치보다 높으니 이미 '깡통전세'다. 이런 식으로 수백 채를 떠안아 빌라왕이 되면, 전셋값이 떨어질 때 차액을 보전해줄 여력이 없어지는 데다, 이미 다주택자에게 매년 부과되는 7.2% 종부세조차 감당 안 되는 처지가 된다. 전셋값 거품이 꺼지면 제일 먼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세입자가 시세보다 높은 금액임을 인지한 상태에서 대출이자를 지원받은 경우가 많아, 미추홀구 건축왕 사건에 비해 사기 입증이 좀 더 까다로울 수 있다는 의견이 많다.

사기 수법은 점차 진화하고 있다. 건축주-분양업자-중개사 등 일당은 '바지 임대인'을 더 많이 모집해 작은 빌라왕을 다수 양산해 감시를 피하기도 했고, 가장 최근 밝혀진 은평구 사건처럼 상업용 근린생활시설을 주거용으로 불법 개조한 '근생 빌라'를 임대하다보니 임차인이 그 어떤 제도적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사례도 속속 알려지고 있다.

세입자가 전입신고를 하더라도 '확정일자 익일 0시 발효' 조항을 이용해 전입신고와 동시에 임대인이 금융기관 대출을 받고 근저당권을 설정하면 세입자는 후순위로 밀리는 점을 악용한 사기, 신탁업체에 소유권이 이전됐음에도 이를 알리지 않고 계약하는 사기, 이중계약 등의 관행적 사기도 여전하다.

수법은 다양하지만 결국 공통점은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20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전세사기 대책 관련 윤석열 대통령 면담요청 기자회견에서 전세사기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전세사기피해자전국대책위원회 및 시민사회대책위원회는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는 제멋대로 해석·보여주기식 일방적인 정책 발표를 중단하라"며,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전세사기, 깡통전세 피해상황과 요구사항을 청취하고 이러한 내용이 충분히 검토된 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촉구했다. 2023.4.20/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정책·제도적 허점 파고든 사기…정부가 피해구제·제도개선 나설 이유

한국주택학회장을 맡고 있는 김진유 경기대 교수는 "여러 전세 사기 피해에 있어 정부의 책임은 분명히 있다. 보증금 대출을 너무 확대한 측면, 보증금 반환 보증보험 기준을 너무 완화한 점 등등이 다 영향을 미친 것"이라며 "그렇기에 상황에 따라 정부가 특별한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책과 제도적 허점을 파고든 사기에 정부도 책임이 있는 만큼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없는 피해자들에게 대안대출을 해준다면 특별법에 거론된 '저리'가 아닌 '무이자' 대출을 해주고, 피해자 다수가 청년·신혼부부인 만큼 청년기금펀드나 저출산·청년주거안정 관련 예산을 전용하는 등 유연한 사고 전환을 해서라도 보다 적극적인 구제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소득이 많고 자산은 없는 이들에겐 월세가 유리한 것처럼 전세는 몫돈이 있지만 월소득이 별로 없는 이들에겐 좋은 제도"라며 "전·월세가 동시에 있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전세가 있어서 외국과 달리 반(半)전세 개념의 보증부 월세도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에 전세 제도 관련 허점이 많이 드러났으니 이를 보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고금리와 전세대출 확대, 임대차3법 등 영향으로 집값과 전셋값이 급등했던 2021년 9월~2022년 7월 거래된 전세 계약 만기 도래로 역전세난이 본격화하면, 보증금 미반환 사고는 더욱 속출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우려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과거 체결된 전세사기 계약 만료 도래로 당분간 전세사기 피해가 지속될 수 있는 만큼 관련 시장에 대한 꾸준한 모니터링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 은평구청에 마련된 전세 피해 지원을 위한 상담센터에서 피해자들이 상담을 받고 있다. 2023.5.3/뉴스1 ⓒ News1 권현진 기자

sab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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