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EU ‘북아일랜드 신경전’ 종료의 의미
세계는 지금 ㅣ 영국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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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31일 밤 11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슬로건과 함께 영국은 유럽연합(EU)을 떠났다. 국민투표 결과 3.8%라는 미세한 격차의 찬성으로 내려진 결정이었다. 이 결정으로 영국은 더는 EU의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EU 회원국인 아일랜드와 맞닿은 북아일랜드 문제가 불거졌다.
회색지대, 북아일랜드
아일랜드가 영국에 합병된 시절, 영국의 개신교 세력과 아일랜드의 가톨릭교 세력이 부딪치며 종교갈등이 점화됐다. 이와 더불어 아일랜드 대기근 시기(1845~1852년) 영국 정부의 외면은 아일랜드 내 반영 감정을 한껏 고조시켰다. 여러 차례의 갈등 이후, 1921년 두 국가는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체결해 아일랜드 남부 26개 주를 자치령인 아일랜드자유국으로 인정하고, 영국 개신교도가 다수 거주하던 북부 6개 주는 영국 지배령으로 남기는 데 합의했다. 자치권을 얻었지만 완전한 독립은 아니었다. 아일랜드자유국의 외교권과 군사권은 여전히 영국이 가지고 있었다. 계속된 저항 끝에 아일랜드자유국은 1949년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고 지금의 아일랜드가 됐다.
아일랜드 독립은 섬의 분단을 의미했다. 영국령으로 남은 북아일랜드 안에서도 아일랜드와 하나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민족주의파와, 영국에 통합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통합주의파 간의 갈등이 지속됐다. 특히 1972년 영국 공수부대가 아일랜드계 가톨릭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자, 두 세력 간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30여 년간 3500명이 죽고 나서야 1998년 미국의 중재로 영국-북아일랜드-아일랜드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이것이 바로 성금요일협정(Good Friday’s Agreement)이라고도 부르는 ‘벨파스트 협정’이다. 벨파스트 협정은 북아일랜드를 영국령으로 인정하나, 아일랜드공화국과 북아일랜드 간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았다. 벨파스트 협정은 피로 물든 수십 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원칙적으로 영국에서 북아일랜드로 물건이 넘어가는 것은 우리가 제주도에 물건을 보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동시에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는 벨파스트 협정에 따라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돼 물자 이동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에도 북아일랜드를 거치기만 한다면 통관·검역 절차 없이 EU 단일시장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영국과 EU는 2021년 1월 ‘EU 탈퇴 협정 내 북아일랜드 협약’(이하 북아일랜드 프로토콜)을 체결했다. 북아일랜드 프로토콜에 따르면,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이지만 EU 단일시장에 잔류한다. 또한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은 부재하며, 영국과 북아일랜드는 같은 국가임에도 상품 교역 때 통관·검역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프로토콜은 아일랜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리적 인접성을 이유로 아일랜드는 물품 대다수를 영국에서 공수하는데, 통관·검역 절차가 도입되면서 물품 운송 시간이 무기한 연장된 것이다. 이 때문에 브렉시트 이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의 교역이 급증했다.
영국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울에서 제주도로 물품을 보내듯 하다가, 이제는 다른 국가와 교역하듯 수많은 통관·검역 작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의약품의 경우 EU 품질관리기준 인증과 레이블링 작업 등 수출하기까지 오랜 준비가 필요했다. 다행히 의약품과 같이 유통이 마비되면 사회적 파장이 큰 품목은 유예기간을 두어 최소한의 통관 절차만으로 오갈 수 있었지만, 유예기간이 끝나면 많은 영국 제약업체가 북아일랜드로의 물품 수출을 포기하리라는 전망이 파다했다.
계속된 잡음에 영국은 북아일랜드 프로토콜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며 EU에 재협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EU의 입장은 확고했다. 북아일랜드는 엄연히 EU 단일시장에 속하기 때문에 영국과 교역할 때 통관·검역 절차가 필요하다며 재협상 반대 뜻을 고수했다. 둘 사이 이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영국이 제16조(Article 16, 자국 사회경제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는 경우 북아일랜드 프로토콜보다 우선해 발동할 수 있는 영국의 비상조치) 발동 가능성까지 언급하는 등 이미 브렉시트로 소원해진 영국과 EU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윈저 프레임워크 합의
2023년 2월27일, 영국과 EU는 오랜 분쟁 끝에 북아일랜드에 관한 새로운 브렉시트 협약(윈저 프레임워크)에 합의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무역전쟁이 거론될 정도로 위험수위를 맴돌던 협상이었지만, 그 긴장감이 무색하게 환한 웃음과 악수로 마무리됐다.
윈저 프레임워크의 주요 합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영국-북아일랜드 간 교역 장벽을 완화했다. 상품의 최종 소비 지역에 따라 통관·검역 여부가 달라진다. 영국에서 북아일랜드로 가는 상품 중 아일랜드와 EU 시장에서 소비될 수 있는 수출용(Red Lane) 상품은 통관·검역을 진행하고, 북아일랜드에서 소비되는 내수용(Green Lane) 상품은 면제된다. 단, 내수용 상품으로 인정받기 위해 무역업자는 ‘신뢰받는 거래자’(Trusted Trader)로 등록해야 한다.
둘째, 식품 및 의약품 통관을 완화했다. 내수용으로 분류된 영국산 상품에 한해 60여 개에 이르는 EU 식품규제가 철폐된다. 다만 해당 상품은 ‘내수용 상품’(Not for EU) 라벨을 부착해야 한다. 해당 조치는 EU의 엄격한 식품규제로 인한 북아일랜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발효됐다. 세계적인 영국 차(tea) 기업 포트넘앤메이슨(Fortnum & Mason)도 EU 식품규제 때문에 EU로의 수출이 불가능하다고 호소했을 정도다.
의약품 관련 규제도 완화됐다. 과거 영국에서 제조한 약을 북아일랜드에서 판매하려면 EU 레이블링 정책에 따라 재포장해야 했다. 하지만 윈저 프레임워크 시행 이후 영국과 동일한 포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정했다. 또한 북아일랜드의 경우 EU 위조의약품지침(Falsified Medicine Directive)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만큼 의약품 유통이 한층 수월해질 예정이다.
셋째, 영국에 북아일랜드 부가가치세 및 보조금 설정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북아일랜드는 EU가 아닌 영국의 부가가치세·보조금 제도를 따르게 된다. 현재 영국에서 시행하는 보일러 교체 보조금 지원제 등이 북아일랜드에도 적용되며, 주류세 등도 EU가 아닌 영국의 제도를 따르게 된다.
넷째, EU의 법·제도 적용 때 북아일랜드에 거부권을 부여했다. 앞으로 북아일랜드는 ‘스토몬트 브레이크’(Stormont Brake) 조항에 따라 EU의 새로운 법·제도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해당 권한은 ‘유의미하게 국익에 반대되거나 장기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경우’에 한해 사용할 수 있다. 다만 해당 조치는 영국 정부의 검토하에 EU에 통보되며, 기존 법률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북아일랜드 민주연합당(DUP) 쪽이 반발하고 있다.
윈저 프레임워크는 2023년 3월25일 공식 발효됐다. 북아일랜드를 두고 영국과 EU가 악수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윈저 프레임워크가 발동되려면 의회 표결 등 몇 차례 승인 절차가 남았지만, 영국과 EU 두 정상이 만나 합의점에 이르렀다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하다. 윈저 프레임워크는 영국과 EU 사이 이어지던 신경전을 끊고, 발전적 교류로 나아가는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회 위원장은 이를 두고 ‘우리(영국과 EU)가 파트너십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다고 믿는 이유’라고 밝혔다.
EU의 양보
아일랜드계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 합의안을 두고 ‘중요한 진전’이라고 표현하며, 벨파스트 협정 25주년을 맞아 북아일랜드 방문을 약속했다. 신페인(Shin Fein·아일랜드공화당) 역시 ‘가장 지속가능한 길’이라며 윈저 프레임워크를 반겼다. 아마존, 세인스버리 등 주요 글로벌 기업들도 영국과 북아일랜드 사이 교역 장벽을 낮춘 합의안에 지지 의사를 표했다.
유럽의 핵심원자재법(CRMA),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역내 장벽을 높이는 경제블록화가 심화하고 있다. 북아일랜드 프로토콜 재협상을 반대하며 팽팽하게 맞서던 EU가 한발 뒤로 물러나 영국의 요구사항을 들어준 것도 유럽 블록경제 결집을 위한 양보로 풀이할 수 있다.
남현경 KOTRA 런던무역관 과장 namhk@kotr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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