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우리의 플러그인] 그 시절 우리집 냉장고는 왜 ‘꽃무늬’였을까?
“그땐 예뻐 보였는데···”
길거리를 지나가다 가끔 버려진 냉장고 폐기물을 마주칠 때면 유독 ‘꽃무늬’ 타율이 높아서 재밌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습니다. 통상 백색 가전 교체 주기가 10~15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수많은 가정에서 그간 ‘열일’해줬던 꽃무늬 냉장고가 수명을 다했다는 의미겠죠. 그때마다 옆에 있는 이들과 나눴던 대화 내용도 매번 비슷합니다. “우리 집도 예전에 저런 냉장고였는데”라며 추억에 잠기거나 지금 기준으론 다소 어색한 미감에 당시 사람들의 안목을 의심하게 되는 식이죠.
그렇다면 내로라하는 가전기업들이 냉장고에 울긋불긋 꽃을 새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플러그인’에선 시대와 함께 변화해온 가전, 특히 냉장고 디자인 변천사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국내 최초의 냉장고는 금성사(현 LG전자(066570))가 1965년 4월 생산한 ‘눈표냉장고(GR-120)’입니다. 냉장실과 냉동실이 일체형으로 이뤄졌고 120L의 저장용량을 갖춘 제품입니다. 이후 1970년대 중반 삼성전자(005930)와 대한전선 등도 냉장고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하며 국내 냉장고 대중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냉장고는 한 집에 한 대씩 있는 보편적인 가전으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약 20년 동안 냉장고는 ‘흰색’ 일색이었습니다. 미국 가전기업 제너럴일렉트릭(GE)이 냉장고·세탁기·에어컨·전자레인지 등의 제품 색상을 백색으로 통일하면서 우리나라 가전기업 역시 이러한 트렌드를 따라간 영향입니다. 냉장고·세탁기·에어컨 등 주요 가전을 이르러 ‘백색가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필 왜 흰색일까요? 흰색이라는 색은 보는 사람에게 압박감을 주지 않는 편안한 색이면서도, 청결함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제조사 입장에서도 생산라인이 다변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색을 가전에 입히는 게 편했습니다.
다만 색이 같다고 이 시기 냉장고 디자인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크기와 형태, 성능에서 어느 때보다도 변화가 많은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제품들만 살펴볼까요? 삼성전자는 1970년대 서리를 자동으로 제거해주는 ‘국내 최초 성에 없는 간냉식 냉장고’, 20%의 절전 효과와 긴 수명을 내세운 ‘하이콜드’ 등 그 당시로선 최첨단 기술을 갖춘 신제품을 다수 내놨습니다. 1980년대부턴 냉장실과 냉동실을 분리한 이중 구조의 ‘투 도어 냉장고’가 소비자를 사로잡았습니다. 금성사에서도 국내 최초로 마이크로컴퓨터를 내장한 마이콤 냉장고, 국내 최초로 김치전용 보관 공간이 탑재된 ‘금성88싱싱냉장고’ 등 다양한 기술 혁신과 라인업 확대가 이뤄졌습니다.
2000년대부턴 국내에서 냉장고 디자인의 화려한 변천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2000년대 초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각각 ‘지펠’과 ‘디오스’ 등 프리미엄 양문형 냉장고 브랜드를 앞세우며 디자인 차별화 열풍이 불었기 때문입니다.
2006년 LG전자가 ‘아트 디오스’ 시리즈로 하상림 작가의 꽃 그림을 활용한 ‘모던 플라워’ 문양을 도입하자 삼성전자도 같은 해 유명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자문으로 꽃의 색상과 문양을 담은 냉장고와 세탁기를 선보였습니다. 이탈리아 주얼리 디자이너 마시모 주끼의 디자인을 냉장고에 입히고, 스왈로브스키 크리스털을 특수 공법으로 새겨넣는 등 가지각색 시도도 잇따랐습니다. 패션, 가구, 인테리어 등 산업 전반의 디자인 브랜드도 이런 트렌드에 동참할 정도로 유행의 한 축이 됐죠.
가전업계에선 당시 사회와 주거환경 변화가 냉장고 제품의 ‘백색 탈피'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분석합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소득과 소비의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명품 선호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주방의 크기를 한껏 키운 신축 아파트들도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인테리어 시장의 급속 성장기와 맞물려 하얗고 거대한 냉장고가 인테리어의 ‘적’이 돼 버린 셈입니다. 이에 따라 공간 내에서의 이질감을 줄이기 위한 여러 시도가 이어졌다는 해석입니다.
화려한 무늬의 유행이 지나간 2010년대, 냉장고 업계에선 세련되고 시크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메탈’ 색상 인기가 급속히 확대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기존 디자인 틀을 과감히 탈피해 사용자 편의 기능을 넣는 데 집중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LG전자는 2010년 ‘냉장고 안 미니 냉장고’로 불리는 수납공간을 넣은 ‘매직 스페이스 냉장고’를 처음으로 선보입니다. 기존 ‘홈바’보다 넓은 공간으로 냉장실 문을 여는 횟수를 최소화하고, 냉기 손실을 낮춰 전기료 부담을 낮춰주는 편의 기능입니다. 2013년 삼성전자가 출시한 ‘지펠 푸드쇼케이스’는 업계 최초로 냉장실을 인케이스와 쇼케이스로 나눠 효율적인 공간 관리를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2010년대 말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개성을 담아내면서 집안의 요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 ‘취향 가전'으로의 변화입니다. 강한 개성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감성을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가전의 주요 소비자로 떠오르며 단순한 기술력을 강조하는 제품보다 ‘라이프스타일 맞춤형 제품’ 의 인기가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2019년 삼성전자는 국내 최초로 도어 패널을 교체할 수 있는 비스포크 냉장고를 선보이며 맞춤형 가전 시장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4도어 기준 167억 개 이상의 색상 조합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내세웠는데요. LG전자 역시 이에 대적하는 공간맞춤가전 ‘LG 오브제컬렉션' 라인업을 재정비했습니다. 작년에는 LG 씽큐(LG ThinQ) 앱에서 원하는 컬러를 선택하면 냉장고 색상이 바뀌는 ‘무드업 냉장고’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취향가전’으로 변신한 냉장고 제품의 인기도 꾸준합니다. 출시 직후 선풍적인 인기에 비스포크 콘셉트는 삼성전자 전 가전 제품군에 퍼져나갔습니다. 현재 삼성전자의 가전제품 중 비스포크 판매 비중만 80%에 달합니다. LG전자 역시 작년 판매한 전체 상냉장 하냉동 냉장고의 90%를 오브제 컬렉션이 차지했습니다.
◇‘플러그인’은 어렵거나 따분하게 느껴지는 전자업계 소식을 조금이나마 재미있게 접근해보자는 목적의 연재물입니다. 사소하지만 지나치기엔 아까운 호기심 해결부터 흥미로운 제품 체험, 산업 전반 흐름까지 알기 쉽게 녹여 전달해드리겠습니다. 망설이지 말고 ‘플러그인’ 해보세요.
노우리 기자 we1228@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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