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 보러 뭍으로 나가랴, 아예 영화제를 만든 섬
물메기 어획량 줄고 관광객 발길 뜸해
섬마을 영화제 계기로 활기 되찾아
문화생활에 관광 콘텐츠까지 1석 2조
"최소 여가 기반 조성돼야 섬도 지속"
편집자주
3,348개의 섬을 가진 세계 4위 도서국가 한국. 그러나 대부분 섬은 인구 감소 때문에 지역사회 소멸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생존의 기로에서 변모해 가는 우리의 섬과 그 섬 사람들의 이야기를 격주로 소개합니다.
두 시간 남짓 상영하는 영화 한 편 보려 뭍으로 나가는 것도 섬 주민들에겐 큰맘을 먹어야 하는 일이다. 배 시간부터 알아보고 상영 시간을 맞춰야 한다. 예기치 못한 풍랑에 돌아오는 배라도 끊기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돈에 시간까지 도시 사람들과 문화생활 격차를 가장 크게 느끼는 일 중의 하나가 영화 관람이다. 그래서 아예 영화제를 만든 섬이 있다. 경남 통영의 추도가 그 주인공이다. 주민들은 집 한편을 작업실로 내주고, 영화감독들은 섬 풍경을 필름에 담는다. 지난달 28일 추도에서 만난 박현여(64) 대항마을 이장은 “섬마을이라고 물고기만 잡고 살 수 있느냐”며 “영화도 보고, 커피도 마실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은 조성돼야 섬도 지속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달라야 살아남는다" 영화제로 차별화
통영시 산양읍 추도는 통영항에서 21km 떨어져 있다. 섬 모양이 밭을 갈 때 쓰는 농기구 가래를 닮았다 해서 가래섬으로 불리다 한자 ‘가래 추(楸)’ 자를 써 추도가 됐다. 여의도 절반인 1.6㎢ 면적에 대항, 미조, 샛개, 물개 등 4개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물개마을은 해가 들지 않아 ‘어둠골’이라고도 불린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나머지 3개 마을 주민등록상 인구는 지난해 말 기준 93가구 144명이다.
추도는 두미도, 욕지도, 연화도, 사량도, 우도 등에 둘러싸인 다도해 중심 섬이다. 육지라면 사통팔달 교통망이 갖춰졌을 법한 요지건만, 실상은 통영항여객선터미널에서 하루 2번 오가는 뱃길이 전부다. 뱃길을 따라 1시간 10여 분을 달리면 미조마을, 10여 분을 더 가면 대항마을에 도착한다. 당일치기로 다녀오려면 오전 6시 51분 배를 타고 들어가서 오후 3시 30분 돌아 나오는 배를 타야 한다.
대항마을 선착장에 내리면 가장 먼저 필름모양 조형물이 방문객을 맞는다. 지난해 처음 개최한 추도 섬마을 영화제 때문에 생긴 입간판이다. 섬마을 영화제라 낯설게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기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로 꼽히는 이탈리아 베니스 영화제도 리도(Lido)섬에서 열리는 점을 감안하면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다. 박 이장은 “다들 섬을 살린다면서 덱(deck) 놓고, 둘레길 만드는 데만 치중하는데 별로 공감이 안 되더라”면서 “우리 마을은 차별화된 섬, 문화가 있는 섬으로 만들자는 데 주민 의견이 모아져 영화제를 열게 됐다”고 설명했다.
본캐는 어부, 부캐는 영화제 집행위
추도 주민들은 ‘물메기’를 주로 잡는다.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3개월 동안 물메기를 잡아 1년을 먹고산다. 농사도 짓지만, 큰 벌이가 되진 않는다. 겨울철이면 울타리, 돌담, 빨랫줄 등 온 동네가 물메기 덕장으로 변한다. 물메기는 살이 물러 대개 끓여 먹는데, 생산량이 많지 않아 수도권에서는 거의 맛볼 수 없다. 특히 추도 물메기는 전통방식인 대나무 통발을 이용해 잡는 데다 섬에서 귀한 담수로 깨끗하게 손질해 더 귀한 대접을 받는다. 시장에 가면 모든 물메기 고향이 추도로 바뀌어 나오는 게 예삿일이다. 때문에 추도 물메기에는 원산지를 입증하는 꼬리표를 붙인다. 하지만 5년 전부터 어획량이 급감했다. 한 마을 주민은 “올해는 좀 덜하지만 지난해까지 어획량이 4분의 1 수준으로 줄면서 어민 절반가량이 물메기 조업을 포기할 정도”라고 푸념했다.
부업인 관광업도 여의치 않다. 추도 방문객은 2016년 5,000명을 정점으로 해마다 500여 명씩 감소하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관광지로 섬이 각광 받을 때조차 1,000여 명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식당이나 마트 같은 편의시설도, 내세울 만한 관광 콘텐츠도 없다.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을 새로운 자극이 필요할 때쯤, 주민들은 뜻을 모아 영화제를 열기로 했다.
섬이 가진 인적·물적 자원 활용 모범 사례
섬 영화제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마을 주민과 전문가 등 6명으로 집행위원회를 꾸리고, 예산은 경남도 공모사업인 ‘살고 싶은 섬 가꾸기 사업’ 응모로 충당했다. 일반 상업영화는 물론 청년 감독들을 초청해 추도에서 체류하며 느낀 감정과 영감을 토대로 단편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하는 시간도 마련했다. 경남이 지닌 섬의 가치를 영상으로 기록해 지역 자산으로 영구보존하자는 취지에서다.
집행위원장은 추도 주민이자 경성대 연극영화과 교수인 동녘필름 대표 전수일 영화감독이 맡았다. 전 감독은 1997년 데뷔작 '내 안에 우는 바람'으로 제50회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 이름을 알렸다. 2008년에는 ‘검은 땅의 소녀와’로 제6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2관왕을 차지한 바 있다. 2020년 제자를 만나러 왔다가 추도 주민이 됐다는 그는 “인위적 꾸밈없이 자연 섬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는 모습에 끌렸다”며 “영화를 통해 이웃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 역시 더할 나위 없는 추도의 매력”이라고 추켜세웠다. 전 감독의 인연으로 영화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블랙머니’ 등을 연출한 정지영 감독과 배우 조진웅도 함께했다.
지난해 9월 23, 24일 이틀간 ‘추도, 바다 한가운데 핀 꽃’을 주제로 제1회 섬마을 영화제가 개막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무슨 영화제냐’며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던 일부 주민들도 똘똘 뭉쳤다. 조시영 경남도 어촌발전과 전문위원은 “주민들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어 좋고, 관광객들은 새로운 볼거리가 생겨 좋은 1석 2조 사업”이라며 “섬이 가진 인적, 물적 자원을 고유 브랜드로 승화시킨 대표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영화제는 시작일 뿐… 정주 여건 개선해야"
성공적으로 첫발을 내디뎠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사유지라 손을 못 대는 폐교의 활용 방안을 찾고, 주민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공유센터를 만드는 등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 교통편도 개선이 절실하다. 가까운 삼덕항에서 20분이면 닿을 거리지만 통영항에서 3배가 넘는 시간을 들여 입도해야 한다. 섬을 방문하는 이마다 고질적인 문제로 꼽는 노후 선박 교체도 시급하다. 마을 주민들은 “영화제는 섬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변화의 시작에 불을 댕겼을 뿐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능키는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천영기 통영시장은 "통영은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570개의 섬이 있다"며 "낙후된 기반시설을 현대화하고 어촌이 보유한 핵심 자원과 차별화된 콘텐츠를 발굴해 ‘살고 싶고, 찾고 싶은 섬’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통영= 박은경 기자 chang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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