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고 새 건물 올리던 제주 원도심…'오래된 미래'가 답
'아름다우면서 단순' 제주 모더니즘 공공건축물
70년대 당시 보기 드문 평지붕에 비대칭 구조
"원도심 역사 담긴 건축" 보존 의견에도 철거
면피성 주민설명회에 문화재 가치 평가도 없어
개발 논리 속에 허물어진 제주 근대건축물들
원도심 재생은 '과거 세대 이야기 전승'으로
▶ 글 싣는 순서 |
①제주 첫 호텔 동양여관…명성 사라진 자리 남은 건 삶 ②개발 광풍에도…제주 일식주택 100년간 서 있는 이유는 ③포구 확장하고 도로 건설…사라지는 제주 어촌 '소통의 빛' ④택지 개발로 사라질 위기 제주 4·3성…주민이 지켜냈다 ⑤'아픈 역사 축적' 제주 알뜨르비행장,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⑥무성영화 시대 제주 마지막 극장 철거…사라진 기억들 ⑦4·3으로 초토화 된 제주 중산간 마을…뿌리 내린 사랑 ⑧제주 최초 철골 건물 시민회관…허물어져도 기억은 유지 ⑨보존계획 세워놓고 철거…사라진 제주 근대 도시의 얼굴 ⑩한국건축계 '보존' 목소리에도…허물어진 '제주의 낭만' ⑪허물고 새 건물 올리던 제주 원도심…'오래된 미래'가 답 (계속) |
"보기에도 편안한 건물이었죠. 철거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부숴버렸어요."
지난 3일 오후 제주시 일도1동 복지회관 맞은편 오디오 가게를 운영하는 정삼권(68)씨는 새롭게 들어선 복지회관 건물을 바라보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 2014년만 해도 이곳에는 '옛 국립수산물품질검사원 제주지원' 건물이 있었다. 근대건축 자산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결국 철거됐다.
'아름다우면서 단순'…모더니즘 공공건축물
이 건물은 서울에서 건축을 공부한 김석윤 건축가가 고향에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내놓은 작품이다. '현대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으로 불리는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스타일로 디자인된 건축물이다. 당시 제주에 있던 공공건축물 중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라 화제였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재학 중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故 김중업(1922-1988) 교수의 수업을 들었던 김석윤 건축가는 '건축은 아름다우면서 단순해야 한다'는 철학에 영감을 받았다. 김 건축가는 이러한 모더니즘 건축 철학을 옛 수산물검역소 건물 설계에 녹여냈다.
현재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옛 수산물검역소 모습을 보면 당시 흔했던 경사지붕과 대칭 구조가 아닌 평지붕에 비대칭 구조의 형태다. 건물 한 면을 할애한 직각 형태의 기둥도 인상적이다.
건축사사무소 '김건축' 김석윤 소장은 "당시 제주에는 모더니즘 경향의 건축물이 소개되기 전이었다. 지금은 고전이 돼버렸지만, 새로운 건축 사조였다. 그 시대에는 상당히 앞서 있던 건축물이었다. 관청 건물로는 첫 작품이었다. 남아있었으면 했는데, 결국 허물어져 버렸다"고 아쉬워했다.
면피성 설명회에 가치 평가도 없이 철거
철거를 앞두고 열린 주민설명회 자리에서 주민들은 "쇠락한 지역 상권을 활성화하려면 낡은 시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옛 수산물검역소가 있던 제주시 원도심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낡은 건물이 아닌 새 건물을 지어야 손님을 모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 건물 보존을 주장한 문화계에서는 "옛 수산물검역소 건물은 제주시 원도심 중심에 자리 잡은 후 수십 년 동안 제주도민의 일상과 호흡하면서 원도심이 변화하는 과정을 증언하는 매우 중요한 공공건축물이다. 철거가 아닌 리모델링 등 다른 방식의 활용방안이 필요하다"고 맞섰다.
보존 노력에도 결국 행정은 철거를 택했다. 9억여 원을 투입해 지금의 일도1동 복지회관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근대 건축물에 대한 종합평가나 문화적 가치 판단도 하지 않았다. 특히 공청회나 주민설명회도 열지 않고 건물을 철거하려다 반발에 마지못해 주민설명회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 보존 운동을 벌였던 고영림 제주국제문화교류협회장은 "기존 건축물을 리모델링해서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면피성으로 열린 설명회에서 철거 찬성 주민과 상인들이 몰려와서는 철거에 다수 투표했다. 폭력적인 다수결로 허무하게도 소중한 근대건축물이 헐렸다"고 분통해했다.
옛 수산물검역소 역시 옛 제주시청사 건물[2023년 4월 7일자 노컷뉴스 : 보존계획 세워놓고 철거…사라진 제주 근대 도시의 얼굴]과 제주 최초의 영화관인 현대극장[2023년 2월 23일자 노컷뉴스 : 무성영화 시대 제주 마지막 극장 철거…사라진 기억들]의 전철을 밟고 사라진 것이다.
원도심 재생, '오래된 미래'가 답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처럼 '낡은 것'은 허물고 '새것'만 중시하는 원도심 재생사업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오래된 미래' 속에 제주다움과 함께 도시의 매력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을 지낸 박경훈 작가는 "제주시 원도심은 천 년된 도시다. 그 시대를 증언할 수 있는 게 관덕정이나 제주향교 건물 등 몇 안 된다. 이마저도 수백 년 전 건물이다. 근대의 시간은 분명히 있었지만, 남아있지 않다. 원도심엔 우스꽝스럽게도 새 건물만 있다"고 지적했다.
"주민은 개발과 경제 활성화 논리에 기존 건물을 철거하자고 하고, 행정에서는 문화재를 지키려는 노력도 없다. 두 박자가 맞아떨어지며 최악의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제주 도시와 건축에 대해 꾸준히 책과 기사를 쓰고 있는 미디어제주 김형훈 편집국장은 "현재 공공 소유의 근대건축은 얼마 없다. 대부분 민간에서 소유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건축자산 현황을 조사해서 소유자가 건물을 보존하되 보수 유지한다고 하면 지원해줄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특히 도시재생은 옛 건축물을 중심으로 단위 구성이 필요하다. 그곳에 사는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게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가 살고 있는 건축물의 가치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과 병행해서 내가 사는 곳의 장소성과 문화적 가치를 일깨워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영림 제주국제문화교류협회장은 "원도심에 있던 근대건축물은 개인적인 추억을 넘어서 과거 세대들의 심적 고향이다. 물리적 공간이 허물어진다는 것은 그 세대의 이야기가 사라진다는 의미다. 그 공간이 유지됨으로써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가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도심 재생이라는 거대한 담론 이전에 우리가 소소하게 살아온 근현대사 이야기가 담긴 건축물을 보존해서 그 이야기를 후대에 전승해줄 필요가 있다. 낡은 것은 불편하고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도지사, 시장, 행정 간부의 철학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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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CBS 고상현 기자 kossang@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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