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얼굴의 부모인가
[[휴심정] 법인스님의 대숲바람]
중국 원나라 초기 황견(黃堅)이 편집한 <고문진보> 시편의 첫째 장은 배움에 힘쓸 것을 권하는 권학문(勸學文)들로 이뤄져 있다. 8편의 권학문 시들은 모두 배움의 소중함과 이로움을 담고 있는데, 이 중 북송 시대 유영(柳永)의 시가 눈길을 끈다. 몇 구절 옮겨 본다.
“부모가 자식을 기르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이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가르친다 하더라도 엄하게 가르치지 않는 것
이 또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데
자식이 배우려 하지 않는 것
이는 자식이 그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배우기는 하되 힘써 노력하지 않는 것
이 역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은근히 자식의 입신양명 출세를 지향하는 글과는 다르다. 우리는 이러한 유영의 시를 다시 되새겨야 한다. 엄하게 기르는 교육이 진정한 자식 사랑의 길이라는 지침은 이 시대에도 울림이 크다.
유영의 뒤를 이어 사마광(司馬光)도 엄정한 자식 교육을 강조했다. “양자불교부지과(養子不敎父之過) 훈도불엄사지타(訓導不嚴師之惰). ‘자식을 기르면서 가르치지 않음은 아버지의 허물이요, 가르침을 엄하게 하지 않음은 스승의 나태함이다’는 뜻이다. 부모와 스승이 지향할 교육 철학과 태도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집 주변에 사마광의 글을 걸어놓고 그 뜻을 환기하고 경책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자식 교육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의 자식 사랑법은 과연 옳은가? 사랑과 교육은 어떻게 어우러져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최근 국가수사본부장에 거론되었다가 아들의 학교폭력이 드러나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의 일련의 행위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널리 알려진 바대로 아들의 학교폭력 사태에 그 아버지는 치밀하고 집요한 소송으로 맞섰다. 세간 사람들은 정순신의 그러한 태도에 분노한다.
자식이 이런저런 과오를 범할 때에는 스승과 부모의 지혜로운 가르침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혜는 법을 따져서 피하고 은폐하고 왜곡하는 기술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목회서신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그렇다. 진정한 사랑은 실상을 바로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정의와 불의를 바로 보아야 한다. 자식의 폭력으로 상처받았을 피해자의 고통을 바로 보고, 나아가 폭력을 행사한 자식의 파괴된 심성을 바로 보고, 건강해야 할 자식의 미래를 바로 보는 지혜로운 처신, 그것이 사랑이다.
법조인 정순신은 법조 문구는 잘 파악했을지언정 자식을 바로 보는 공정한 관찰자는 아니었다. 공정한 관찰을 하지 못한 그는 자식에게 엄하지 못했다. 아들을 명문 학교에 보내고 많은 교육비를 지원했지만, 친구에게 고통을 가한 아들의 행위에 분노하지 않았고, 마음 아파하지 않았고, 교묘하게 아들을 감싸기에만 급급했다. 사마광의 말대로 허물이 크다. 유영의 말대로 자식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부끄러워하지 않은 아들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둘 다 허물이 크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참회하지 않는 허물이 크다.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들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공정한 관찰의 지혜와 엄한 태도의 사랑이 우리 시대 교육에 절실한 지금, 간디와 그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명문가에서 성장한 간디는 여느 또래들과 같이 종종 일탈 행위를 하곤 했다. 15세 무렵 간디는 형의 주머니에서 금화 몇 개를 훔친다. 진실을 외면하지 못한 그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상세한 반성문을 제출한다. 그것을 읽는 아버지의 손은 심하게 떨렸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아버지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이 반성문에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아버지는 반성문을 쭉쭉 찢었다. 이 사건 이후 간디는 일탈 행위를 단호하게 끊었다. 위대한 혼은 이렇게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에서 깨어났다. 간디는 그때 더없이 슬퍼하던 아버지 얼굴에서 사랑과 진실의 힘을 보았던 것이다.
세간 부모들의 대화를 옆에서 종종 듣는다. 주요 화제는 자식의 학교 성적과 진학이다. 부모는 자식의 토익 점수를 자랑하고 수학 점수에 일희일비한다. 학교 성적만 높으면 그 외 허물은 허물이 되지 않는다. 부모가 아이의 삶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의 수학·영어 점수를 사랑하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생각해 보라. 어린 자식은 자신을 향한 부모의 어떤 모습을 보고 자랄까? 자식은 예민하게 알아챌 것이다. 부모가 나의 무엇에 마음 아파하고 무엇에 기뻐하는지를. 그리고 그것에 집중할 것이다. 친구를 멸시하고 조롱하는 모습에도 충격받지 않는 부모와 친구를 사랑하는 모습에 기뻐하는 부모. 우리는 어떤 얼굴의 부모인가? 거울을 들여다볼 시간이다. 무엇보다 부모는 스스로에게 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법이다.
법인 스님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지리산 실상사)
*이 글은 참여연대가 발행하는 <월간참여사회> 5월호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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