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어린이보호구역 참사,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뒤늦은 대책 쏟아져, 학부모 단체 "현실적 대책 내놔야"
(부산=연합뉴스) 차근호 기자 = 부산 영도구 청동초등학교 앞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참사가 발생한 것은 지난달 28일이다.
5월 5일 어린이날을 딱 일주일 남겨둔 시점이다.
여느 날처럼 평범했던 등굣길은 오전 8시 22분 난데없이 굴러온 1.5t 원통형 대형 화물로 인해 비명과 울음소리가 가득 찬 현장으로 변했다.
이날 사고로 10살짜리 초등학생 황예서 양이 숨졌고, 다른 초등생 2명과 학부모 1명도 다치는 사고가 났다.
드러나는 부실 작업 정황
5일 부산경찰청에 따르면 참사를 유발한 화물은 황 양이 숨진 곳에서 100여m 떨어진 어망 제조공장에서 하역 작업 중 떨어뜨려 비탈길을 따라 굴러내려 왔다.
영도 봉래산 자락에 있는 청동초 앞 등굣길은 10도 이상의 가파른 경사가 이어지는 곳이다.
해당 어망 제조 공장은 사고 20분 전쯤부터 대형컨테이너 차량으로 싣고 온 그물 원료인 '원사롤'을 지게차로 내리고 있었다.
어망제조업체가 있는 곳은 어린이보호구역이어서 불법주정차가 허용되지 않지만 이날 작업은 이뤄졌다.
작업자들이 무게 1.5t의 원사롤을 3∼4개쯤 내려 인도 한쪽에 쌓아놓고 다음 원사롤을 내리려 하던 중 문제가 발생했다.
원사롤이 눕혀지지 않고 세워지게 되자 지게차 운전자가 별도의 안전조치 없이 원사롤를 지게차로 쳐서 눕히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원사롤이 지게차를 빠져나가며 비탈길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때 작업자들이 버팀목 등을 던져 원사롤을 멈추려고 했지만, 원사롤은 버팀목을 타고 넘어 사고 현장으로 향했다.
원사롤은 어린이보호구역 펜스를 무너뜨린 뒤, 황 양 등이 있던 곳을 덮쳤다.
황 양 등은 당시 비탈길을 내려가며 등교하고 있어 뒤에서 굴러오는 원사롤을 제대로 피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게차 운전자는 이 공장 대표로 그가 무면허로 운행을 한 사실도 밝혀졌다.
경찰은 공장 대표를 사고 이튿날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했고, 무면허 운전 부분에 대해서도 건설기계관리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또 경사면 작업 때 표준안전 작업 지침을 준수했는지도 확인하고 있다.
경사면에서는 화물을 취급할 때는 버팀목이나 고임목 등으로 안전조치를 해야 한다.
경찰은 당시 하역작업을 여러 명이 했던 만큼 조사 결과에 따라 입건자가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한다.
경찰은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지난 4일에는 해당 공장을 압수 수색하면서 수사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쏟아진 '사후약방문' 대책들
사고가 난 뒤 대대적인 언론 보도가 이뤄지자 나흘 만인 지난 2일 부산시와 경찰, 영도구 등은 뒤늦은 사고 방지 대책을 일제히 쏟아냈다.
부산시는 어린이 보호구역 안전 실태를 전수조사하겠다고 발표했고, 등하교 때 안전관리 인력을 배치하거나 교통봉사 체계를 갖추겠다고 말했다.
어린이보호구역 내 불법 주정차를 못하도록 과태료도 기존 3배에서 5배로 올리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영도구도 사고가 난 현장에 불법 주정차를 못하도록 시설 유도봉을 설치하고 주정차 단속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겠다고 했다.
안전 펜스도 보강하고, 그동안 미설치된 구간에도 펜스를 추가 설치하겠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어린이보호구역 내에서 위험한 업체나 대형 트럭으로 하역 작업을 하는 곳은 없는지 전수조사하기로 했다.
또 청동초 앞 등굣길에 화물 차량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통행금지를 하는 방안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학부모 단체 "재발해선 안 돼…현실적 방안 내야"
강진희 부산학부모연대 상임대표는 "제발 등굣길 위험을 아이나 학부모에게 전가하지 말고 사회가 책임질 수 있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 대표에 따르면 해당 사고 이후 바쁜 출근 시간을 쪼개서라도 아이들의 손을 잡고 데려다주는 학부모가 늘어났다.
비탈길이 많은 영도구에 사는 학부모들은 "여기서 사는 게 죄냐"며 좌절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강 대표는 특히 부실한 안전 펜스 문제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고가 난 곳을 포함해 현재 부산 시내 초등학교 앞에 설치된 안전 펜스는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킬 수 없다.
아이들이 도로 밖으로 뛰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보행자 경계용' 펜스여서 건장한 성인 남성이 발로 몇번을 차면 쓰러질 정도로 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속도로나 교각 등에 설치되는 충격 보호용 안전 펜스도 있지만, 어린이 보호구역에는 설치할 의무가 없어 일부 초등학교 외에는 설치된 곳을 찾기 어렵다.
강 대표는 "안일한 안전 펜스 규정을 고쳐야 한다고 학부모들 모두 강력하게 이야기한다"면서 "돈 몇푼에 생때같은 목숨을 또 잃는 일이 없도록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read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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