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요리를 만나면?...분자 요리 ①[뉴트리노의 생활 과학]

노성열 기자 2023. 5. 5.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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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 요리 화학 실험실에서나 쓸법한 기구와 기발한 조리법을 활용해 새로운 맛과 질감을 추구하던 분자 요리는 20세기 후반에 등장해 지금까지 요리의 과학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모든 사물은 진화한다. 현재의 주류가 좀 지나면 과거와 전통이 되고, 새로운 시대 정신에 맞는 참신한 도전자들이 등장해 이윽고 주역이 된다. 요리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뜨거운 열과 압력으로 굽고 찌고 졸이는 가열법과 효모 등 미생물을 이용한 발효법이 조리의 전통 테크닉이라면 현대 요리는 보다 다양한 과학적 수단을 총동원해 새로운 맛과 질감을 창조해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분자 요리(molecular gastronomy)’다. 과학사 관점에서 보면 분자 요리는 전통 생물학을 분자 수준으로 내려와 분석하는 분자 생물학의 탄생과 궤를 같이 한다. 살아있는 유기 조직체의 장기-조직-세포 단계를 연구하던 생물학은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유전자(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규명한 대발견과 함께 20세기 말 분자 생물학, 정보 생물학으로 진화한다. 유전이란 생명 현상이 DNA 염기서열의 정보 복제임이 드러나자 생물학은 갑자기 화학과 수학의 융합 학문이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리의 세계에서도 일부 물리화학자들이 부엌으로 쳐들어가 ‘분자의 나이프와 포크’로 요리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실험실에서나 쓸법한 비커와 플라스코, 스포이드, 액체질소 같은 신무기로 무장하고 맛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연구했다. 분자 미식학이란 단어가 생겨난 배경이다. 분자 요리는 20세기 후반 유럽 지역의 일부 식당에서 처음 출현해 한때 전 지구촌의 미식가들 입맛을 사로잡다가 지금은 다소 열기가 식은 듯 하다.

하지만 식재료와 요리 과정을 분자 단위로 계량·분석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음식이 아닌 매우 다른 형태의 새롭게 변형된 요리로 재창조하는 분자 요리의 과학적 도전 정신은 모든 셰프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심지어 철학적으로 모든 기존 관념을 해체한 뒤 새롭게 재조합함으로써 내면의 숨은 의미를 드러내려는 모스트 모더니즘의 탈(脫) 구축(deconstruction) 정신을 닮았다는 찬사까지 들었다. 분자 요리의 초기 정신도 ‘고전 요리와 전통 조리법의 고정 관념을 깨고 재료와 레시피의 각 요소를 분해한 후 다시 조합해 과거와 다른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통 요리를 재해석해 새로운 질감과 형태의 요리로 창조해내는 모던 퀴진(modern cousine·현대 요리)의 총아로 꼽혔다.

얼굴합성 뉴트리노 생활과학 컷

분자 요리업계에서 나타난 첫 번째 스타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 있던 레스토랑 ‘엘부이’의 셰프 페란 아드리아였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대표 요리는 식자재로 만든 식용 거품인 에스푸마(espuma)이다. 생크림이나 달걀 흰자를 거품 내서 만든 서양의 전통 조리법 중 하나인 무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아산화질소가 충전된 소다 제조기에 식자재를 넣고 쏘면 거품으로 변한다. 완두콩이나 허브를 거품으로 탈바꿈시켜 조리한 요리는 미식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아드리아 셰프는 “인간의 오감을 모두 자극하며 뇌를 깜짝 놀라게 하는 요리”를 표방했다.

기발하고 실험적인 그의 분자 요리를 두고 ‘재료 모독’ ‘과학 겉핥기’란 비판도 많았으나, 아무도 모르던 재료의 잠재된 매력을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끌어올려 식탁이란 무대에 올린 용기는 높이 평가된다. 1997년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최고 등급인 별 3개를 받았고, 2006년부터 4년 연속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1위에 올랐다. 세계에서 가장 예약하기 힘든 식당으로 명성을 떨치다가 2011년 문을 닫고 2014년 엘부이 재단으로 변신했다.

아드리아 셰프는 흥미롭게도 과학자와 비슷한 3가지 원칙을 고수했다고 한다. 첫째, 개발한 모든 조리법을 조건 없이 공개하는 오픈소스 방식을 택했다. 둘째, 몰려든 젊은 요리사들끼리 팀을 이루게 해 집단지성을 유도해냈다. 셋째, 새로운 맛을 요리와 과학의 융합처럼 다른 분야와의 협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투명·개방과 공유, 협업, 융합 등 21세기 시대 정신을 앞서 음식의 세계로 도입한 선견지명이 돋보인다.

분자요리 2 과일의 즙을 젤이나 무스 형태로 재창조한 분자 요리의 주방 모습. 이들은 ‘맛의 과학자’란 별명을 얻었다. 게티이미지뱅크

두 번째 스타는 영국 런던의 서부 버크셔 지방 레스토랑 ‘팻 덕’의 셰프인 헤스톤 블루멘탈이다. 팻 덕은 2004년 미슐랭 가이드 최고점인 별 3개를 획득한 데 이어 2005년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1위로 선정됐다. 블루멘탈은 자신의 주방을 실험실로 부르며 ‘다감각 요리’를 내세웠다. 예를 들어 해산물 요리를 서빙할 때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들리는 아이팟을 나누어주며 청각과 미각의 조합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대학교수들과 공동 연구를 통해 조리과학 논문을 발표하는 등 매우 학구적인 요리사이다.

또 한 사람의 스타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립농업연구소의 에르베 티스 연구원이다. 그는 1992년 물리학자 니콜라스 쿠르티와 함께 제1회 분자 물리 가스트로노미 국제워크숍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분자 가스트로노미(미식학)란 신조어가 처음 나왔다. 티스 연구원은 이에 대해 “조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의 매커니즘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아드리아 셰프와 달리, 단지 맛난 요리를 창조할 뿐 아니라 맛있는 요리에 숨겨진 과학적 규칙을 찾는 데 주력했다.

이 밖에도 하버드대학 응용수학과 마이클 브래너 교수의 ‘과학과 요리’ 강의는 스테이크를 구울 때 단백질 분자의 밀도 변화 같은 요리 속 과학을 즉석 실험으로 학생들 앞에서 구현해 대형 강의실이 꽉 찰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그는 “응용물리학과 공학의 기본원칙을 학생들에게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시도해봤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밝혔다.

거꾸로 일류 셰프들이 강단에 서서 요리의 과학을 가르치기도 한다. 2013년 세계 최고 레스토랑 1위에 오른 스페인 ‘엘 세예르 데 칸 로카’의 셰프 조안 로카와 미슐랭 가이드 별 2개를 받은 뉴욕 레스토랑 ‘모모후쿠’의 셰프 데이비드 창, 초콜릿 크리에이터인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엔리크 로비리 등도 대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했다. 요리를 과학적 학문의 대상으로 여기는 진지한 이들은 저마다의 세계에서 스타로 거듭나며 대중적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노성열 기자

뉴트리노 블로그 https://blog.naver.com/neutrino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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