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기반 무료 OTT ‘패스트’ 열풍, 방송 시장 판도 바꿀까[테크트렌드]

2023. 5. 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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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형 유료 OTT 모델 와해시키는 패스트…광고 기반 무료 시청으로 급부상
광고 기반 무료 스트리밍 TV 플랫폼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매년 4월 중순 미국에서 전미방송협회가 주최하는 세계 최대 방송 장비 박람회인 ‘나브(NAB)’가 열린다. 올해 100주년을 맞이하는 나브는 글로벌 방송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행사다. 이런 나브에서 올해 주목하는 분야 중 하나로 새로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모델 ‘패스트(FAST)’를 선정했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용어지만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는 기존 케이블 방송을 대체하는 차세대 미디어 서비스로 각광받고 있다. 이번 나브에서도 작년 미국에서만 40억 달러(약 5조3000억원) 이상의 광고 수익을 창출한 패스트가 향후 3년간 3배로 성장한 약 120억 달러(약 15조8000억원)의 수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재 미국 가구 10가구 중 6가구가 시청할 정도로 대세로 자리 잡은 패스트는 처음 등장한 2013년부터 2019년 전까지 8개 사업자에 불과했지만 2022년에는 22개로 늘어났다. 

특히 OTT에 밀려 시청률 하락과 가입 해지를 경험하고 있는 미국 지상파 방송사나 케이블 등 유료 방송사들은 대부분 패스트에 참여하고 있다. 파라마운트 글로벌의 플루토 TV(Pluto TV), 폭스의 투비(Tubi), 컴캐스트의 수모(Xumo), 엔비시유니버설의 피콕(Peacock)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등 기존 구독 기반 OTT마저 패스트 시장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올 4월에는 빅테크 기업인 구글도 ‘구글TV’의 ‘라이브 TV’ 탭에 800개가 넘은 패스트 채널을 론칭했다.

한국에서는 과거 판도라TV와 현대HCN의 ‘에브리온 TV’가 유사 채널을 운영한 적이 있지만 현재는 콘텐츠미디어그룹 뉴(NEW)의 ‘뉴아이디’가 ‘삼성TV 플러스’에 13개 패스트 채널을 제공하고 있다.

전통적인 선형 방식 TV 시청으로 회귀하는 ‘패스트’

그렇다면 대체 패스트는 무엇이고 왜 최근 주목받고 있을까.

패스트는 광고 기반 무료 스트리밍 TV 플랫폼(Free, Ad-supported Streaming Television)이다. 사용자들에게 무료로 다양한 채널과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광고를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

개념 자체로 봤을 때는 기존의 OTT 스트리밍 서비스와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현재 OTT 스트리밍 서비스는 구독 기반 주문형 비디오(SVOD)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광고 기반 주문형 비디오(AVOD), 편당 결제하는 거래 기반 주문형 비디오(TVOD), 유료 기반 스트리밍 TV(PAST TV) 등 다양한 수익 모델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스트는 몇 가지 점에서 기존 OTT와 차이가 있다. 첫째, 패스트는 기존 전통적인 TV 시청 방식을 따른다. 주로 주문형 비디오(VOD)로 사용자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골라 보는 기존 구독형 OTT와 달리 패스트는 미리 방송사가 편성한 프로그램 순서에 의해 제공되는 채널을 수동적으로 시청하는 선형(linear) 방식이다. 시청자들은 케이블이나 위성 방송의 전자 프로그램 가이드(EPG)와 유사한 프로그램 편성 가이드에 따라 원하는 채널을 시청하면 된다. 

둘째, 패스트는 광고 기반의 무료 서비스다. 기존 구독형 유료 스트리밍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와 달리 가입비가 없고 광고를 통해 수익을 얻는다. 소비자에게 비용을 부과하지 않고 콘텐츠 자체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패스트의 핵심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가 소비자들에게 스며들 수 있었던 것은 최근 금리 인상과 물가 상승 등 경제 불황으로 구독을 통한 유료 서비스 유지에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유료 방송 수신료가 워낙 비싸다 보니 가격에 민감한 소비자들이 유료 가입을 해지하는 소위 코드커팅(cord cutting)이 빈번히 일어나는 시장이다. 이에 비해 패스트는 일정 시간 분량의 광고만 본다면 구독료나 월 수신료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셋째, 패스트는 실시간 스트리밍 서비스다. VOD 형태가 주축인 기존 OTT 모델과 달리 실시간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AVOD와는 광고 기반이라는 점은 같지만 실시간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즉, 실시간 스트리밍 채널과 VOD 콘텐츠가 함께 제공된다.
 

구독형 유료 모델 시대 저문다

패스트의 부상은 기존 미디어 산업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줄까. 

구독 경제 모델에 기반한 기존 유료 OTT의 시대는 가고 광고 기반 무료 스트리밍 OTT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구독 경제는 상품과 서비스를 ‘소유’하는 것에서 ‘접속’이라는 이용 경험을 중시하는 소비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끌어 왔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 이후 불어닥친 글로벌 경제 침체와 저성장으로 인해 소비자들의 소비 성향이 바뀌면서 구독 경제의 기반마저 흔들리고 있다. 최근 조사(딜로이트)에 따르면 미국 OTT 이용자는 월 48달러(약 6만3000원)를 SVOD로 지출하고 있는데 향후 3분의 1 정도가 이 서비스 비용을 줄일 계획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광고만 보면 유료 방송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를 무료로 시청할 수 있는 패스트의 등장은 소비자들에게 분명 매력적 선택지인 것은 분명하다. 소비자들은 단지 인터넷 연결이 가능한 스마트 TV나 저렴한 스트리밍 미디어 플레이어만 있으면 충분하다. 

기존 콘텐츠 제공 사업자에게도 패스트의 부상은 콘텐츠 자체를 브랜드로 만들어 이를 통한 새로운 수익원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기존에 판매되지 않던 콘텐츠 라이브러리의 활용도를 높일 수도 있다. 채널이 많다 보니 아마존이나 넷플릭스에서 목격했던 틈새시장의 중요성을 보여준 롱테일 법칙도 적용할 수 있다. 프로그램 다양성 면에서도 새로운 창구가 생긴 것이다.

가입자 이탈과 수익성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구독형 OTT 플랫폼들도 패스트같은 광고 기반 무료 서비스가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해 줄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구독형 OTT 사업자들은 원하는 오리지널 콘텐츠만 보고 바로 해지 후 다시 다른 OTT로 갈아타거나 여러 서비스에 가입(멀티호밍)하는 가입자들로 인해 가입자 유지 비용이 많이 드는 등 수익 악화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스마트 TV를 가지고 있는 가전사에도 패스트는 좋은 기회다. 사실 OTT는 TV 제조사보다 넷플릭스 같은 OTT 플랫폼 사업자가 주도하는 시장이다. 시청자들이 보는 스크린도 TV보다 스마트폰이나 PC 같은 개인용 단말이다 보니 TV가 아예 없는 ‘T V 제로’ 가구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패스트의 등장과 스마트 TV의 보급 확산으로 이러한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최근 출시되는 TV는 거의 대부분 스마트 TV이다 보니 스마트 TV에 기본적으로 탑재된 패스트 채널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졌다. 실제로 최근 조사 보고서(Conviva)에 따르면 패스트 시청은 주로 스마트 TV, 커넥티드 단말이나 게임 콘솔(77%)로 이뤄지고 있다. 패스트의 등장으로 스마트 TV가 주 스크린이 되고 있다는 것은 TV 제조사에도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이에 따라 스마트 TV 가전사의 패스트에 대한 참여가 적극적으로 바뀌고 있다.
 
2015년 패스트 채널인 삼성 TV 플러스를 출시한 바 있는 삼성은 현재 전 세계 24개국에서 1600여 개의 스트리밍 채널과 자체 운영 채널 50개를 운영하고 있다. LG 스마트 TV도 현재 미국에서만 350개 이상의 패스트 채널을 가지고 있고 파라마운트 OTT인 ‘피콕’과 협력해 유럽에 진출할 계획이다. 최근 넷플릭스의 스트리밍 미디어 플레이어 ‘로쿠’ 인수설도 이런 맥락에서 나오고 있다.

결론적으로 최근 패스트의 부상은 미디어 생태계의 게임 규칙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새로운 OTT 플랫폼 패스트의 부상이 주는 가치는 디지털 TV 시대의 특징인 쌍방향적이고 능동적인 시청 방식이 아니고 전통적인 TV 시청 방식인 선형적이고 수동적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번 나브에서 지적된 것처럼 패스트의 시청자가 주로 연령층이 높은 시청자이고 모두가 선형 채널을 선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일시적인 트렌드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북미와 유럽에서의 패스트 열풍이 한국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심용운 SK경영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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