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경찰관]⑧ “또 다른 정인이는 없어야”... 아동안전 책임지는 곽현정 학대예방경찰관
“말 못하는 영유아 학대 여부 파악할 수 있어야”
정인이사건 당시 ‘학대전담의료기관’ 설치 제안
정서적 학대 급증... “부부싸움도 아동학대”
지난해 여름 오랜 시간 ‘쓰레기집’이라 불리던 곳에서 두 아이가 발견됐다. 집안은 케케묵은 음식물 쓰레기와 온갖 생활 폐기물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아이들은 한 동안 씻지도 못한 모습이었지만 이런 환경이 익숙하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곽현정(47) 서울 관악경찰서 학대예방경찰관(경위)은 한시라도 빨리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분리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이튿날 아이들의 학교로 찾아간 곽 경위는 집에서 나와 아동보호시설로 갈 것을 제안했다. 집 밖으로 나가길 주저하는 아이들에게 잠 자는 곳(침대)과 밥을 먹는 곳(식탁)이 친구 집과는 다르지 않은지, 질문을 이어갔다.
설득에 성공한 곽 경위는 아이들에게 새 둥지를 찾아줬다. 보호시설에 들어간 아이들은 청결한 환경에서 돌봄을 받게 됐다. 조현병이 있는 친모는 아동학대(방임) 가해자로 입건해 치료를 받도록 했다. 오랫동안 방치된 집 역시 아이들이 돌아갈 수 있도록 환경 개선을 병행하고 있다.
곽 경위는 얼마 전 첫째 아이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공부할 수 있는 곳에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학급에서 손꼽히는 우등생이었던 아이는 집에서도 공부를 할 수 있게 돼 신이 난 목소리였다.
그는 지난 28일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최종 목표는 ‘원 가정 복귀’인 만큼, 아이의 부모도 집도 교육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도록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밝아진 아이의 모습이 쭉 유지될 수 있도록 아동보호전문기관과도 긴밀히 협력 중”이라고 상황을 전했다.
곽 경위는 올해로 6년 차가 된 베테랑 학대예방경찰관(APO·Anti-abuse Police Officer)이다. 2000년 순경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한 그는 구로경찰서 형사과와 기동대를 거쳐 2018년부터 APO 생활을 시작했다.
곽 경위가 APO 지원을 결심한 건 2016년 4월, 평택에서 7살 원영군이 계모에 의해 살해당해 사회적 공분을 사던 때였다. 사건을 계기로 APO가 신설되자 곽씨는 ‘APO가 돼 한 아이라도 더 살려야 겠다’는 결심하게 됐다.
그로부터 2년 뒤 딸이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들자 곽 경위는 APO에 지원해 아동·노인·장애인학대와 가정폭력 범죄를 전담하는 전문경찰관으로 거듭났다.
◇ ‘정인이 사건’ 당시... “영유아 ‘전담의료기관’ 지정해야”
곽 경위는 매일 아침 관악구에서 벌어진 모든 학대 관련 신고를 샅샅이 점검한다. 현장 조치가 적절했는지, 보완할 부분은 없는지 검토를 마친 후 ‘설마’ 하는 부분까지 발견한다.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면 현장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집요함을 갖게 된 건 재작년 7월 ‘사실혼 관계 부부가 육아문제로 다퉜다’는 신고 내역을 검토하면서다. 그는 문득 아이의 출생신고 여부가 궁금했다. 세 통의 전화를 모두 받지 않자 그는 그들의 주거지로 찾아갔다.
고시촌 방 한 구석에는 생후 두 달이 채 안 된 아이가 누워있었다. 혼인 상태에 있던 친모가 혼외자를 출산하면서 출생 신고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이 안전이 우려된 곽 경위는 지자체와 협력해 출생신고를 도왔다.
당시 몸 상태가 안 좋았던 아이는 출생신고를 한 덕에 의료 혜택도 받게 됐다. 1주일간의 입원 치료가 끝난 날, 아이의 엄마는 곽 경위에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같은 경험을 계기로 곽 경위는 ‘정인이 사건’이라 불리는 양천구 아동학대 사망 사건 때, APO를 대표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간담회에 출석했다. 말을 못하는 영유아들이 학대를 당했는지 파악하려면 ‘아동학대 전담의료기관’을 지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동학대 전담의료기관은 학대 피해 아동이 보다 신속하고 전문적으로 치료 보호될 수 있도록 의료 지원을 하는 곳으로, 보건복지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정하고 있다. 그의 노력 덕에 현재 서울시에는 전담의료기관이 모두 지정된 상태다.
◇ “아이 앞에서 하는 부부싸움도 아동학대입니다”
수 천건의 아동학대 사건을 검토해 온 곽 경위는 최근 들어 ‘정서적 학대’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21년 정서적 학대 피해 건수는 전년 대비 157%가량 증가한 바 있다.
곽 경위는 “2021년 아동이 가정폭력 범죄에 노출된 경우도 ‘정서적 학대’에 해당하도록 관련 법이 개정되면서 정서적 학대의 비중이 높아졌다”며 “아이 앞에서 하는 부부싸움도 명백한 아동학대라는 것을 모든 부모들이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곽 경위는 아동학대가 근절되기 위해선 ‘가해자와 사회적 인식’ 두 가지가 바뀌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곳에 머무는 환경적 특성 때문이다.
곽 경위는 “아동학대는 가정 내 범죄이기에 가정이 해체되지 않는 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곳에 있게 된다”며 “이 때문에 가해자가 바뀌어야만 해결이 가능한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는 “가해자의 변화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아동학대=범죄’라고 인식할 때 가능하므로 학대를 훈육으로 보는 개인들의 시각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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