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법은 폐지됐다 그러나…아파르트헤이트 그 후
남아공 백인 농장주 가문의 몰락 그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전후 혼란 담아내
'카메라아이' 독특한 서술 기법 매력
팬데믹 여파로 세계 경제가 곤두박질쳤던 2년 전.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의 대규모 폭동 기사가 국제 뉴스를 뒤덮었다. 약탈과 방화는 1주일 이상 이어졌고 212명 이상이 숨졌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후 최악의 폭력 사태'로 불린 이 폭동은 사실 아파르트헤이트의 암울한 유산이기도 하다. 흑인의 거주 지역까지 극도로 제한한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는 1994년 공식 폐지됐으나 백인이 우월적으로 지배하는 사회 경제 체제는 강고하다. 그로 인한 불평등과 빈곤에 대한 분노가 불쏘시개가 된 폭동이 그 생생한 증거다.
그래서 남아공 작가들의 문학은 여전히 아파르트헤이트와 뗄 수 없다. 2021년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 부커상을 받은 데이먼 갤것(60)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대학 시절인 1980년대 전국적인 반정부 투쟁과 무자비한 진압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었다. 부커상 수상작인 그의 아홉 번째 소설 '약속' 역시 백인 농장주 스와트 가문의 30여 년에 걸친 몰락 과정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전후 남아공의 혼란한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 갤것의 작품으로는 최초의 한국어판이다.
17세 때 '죄 없는 계절'로 데뷔한 작가는 3수(修) 끝에 부커상을 거머쥐었다. 2003년 '굿 닥터'로 처음 최종후보자가 돼 세계 문단에 이름을 알렸고 '낯선 방에서'(2010)로 다시 최종후보에 올랐다. 남아공 문인인 네이딘 고디머, 존 맥스웰 쿳시의 전례처럼 부커상을 발판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껏 모으는 작가이기도 하다.
소설은 아프리카너(남아공에 사는 네덜란드계 백인) 스와트 가문 막내딸 '아모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엄마 '레이철'은 암 투병 중인 자신을 간호해 준 흑인 하녀 '살로메'에게 그녀가 사는 허름한 판잣집을 주고 싶다는 뜻을 남편 '마니'에게 전한다. 하지만 1986년 레이철이 죽고 나자 마니는 그 약속을 모른 척한다. 아모르는 아빠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만 마니의 거부는 완강하다. 흑인이 집을 소유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이유를 내세우지만 문제의 본질은 '흑인에게 내 재산을 줄 수 없다'는 신념이다. 아빠는 물론 오빠 '안톤', 언니 '아스트리드'도 이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가족에 대한 실망으로 고향을 떠났던 아모르가 귀향해 그 약속을 지킬 때까지 무려 30년이 걸린다. 약속은 이행했지만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살로메 아들 '루카스'의 항변이 가시처럼 박힌다. "아직도 네가 모르고 있는 게 있는데, 네 것을 주는 게 아니야. 이 집은 이미 우리의 것이니까……백인 아가씨, 네가 가진 모든 것은 이미 내 것이야. 내가 요청할 필요도 없이."
남아공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한국 독자들에게도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식민과 수탈의 피해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남아공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빼앗고 빼앗기고 억압과 수탈을 당하는 인류 야만의 역사에 대한 하나의 우화"(이소영 번역가)라는 평처럼 갤것의 메시지는 보편적이다. "때때로 이어지고 간신히 연결"되는 관계이자 "이 나라를 하나로 묶고 있는 이상하고도 단순한 융합 중 하나"인 아모르와 살로메의 모습은 작지만 귀한 희망을 국경 너머로도 전한다.
독특한 서술 기법은 부커상 심사위원단도 극찬한 이 작품의 매력이다. 일종의 '카메라아이' 방식으로 여러 인물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듯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처럼 한 인물을 클로즈업하다가 갑자기 다른 대상에게 옮겨 가기도 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을 연상케 한다. 이런 기법들은 복잡한 인물의 내면을 충실히 보여주고 다층적으로 상황을 조명하는 데 효과적이다. 초반에는 1인칭과 3인칭 화자 사이를 넘나드는 서술에 혼란스럽지만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빠르게 책장이 넘어간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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