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는 역동, 난자는 수동? 동물 세계의 암컷은 쟁취하고 방탕하며 군림한다 [책과 세상]
편집자주
책, 소설, 영화, 드라마, 가요, 연극, 미술 등 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젠더 이슈를 문화부 기자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봅니다.
"암컷은 착취당하는 성이다. 착취의 진화적 근거는 난자가 정자보다 크다는 사실에 있다."(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수컷은 역동을, 암컷은 수동을 상징한다는 편협한 개념이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해 왔다. 3억 분의 1의 경쟁을 뚫은 정자만이 고요히 머무르는 난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나. '진화론 아버지' 찰스 다윈의 생각이었다. 그는 짝 찾기 투쟁인 '성선택'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번식 경쟁을 수컷의 것으로만 봤다. 암컷은 일반적으로 수줍게 구애를 받는 역할에 머무른다.
사실 다윈은 알고 있었다. 짝을 찾는 데에 있어서 무엇보다 '암컷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조금도 실용적이지 않은 화려한 공작의 꼬리 같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만 가부장제가 진실을 가렸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살피는 것에 여성의 역할을 제한한 빅토리아 시대에, 암컷에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발상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최근 여러 과학연구는 수정 과정에서 난자가 정자를 '선택'한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여타 동물뿐 아니라 인간도!
신간 '암컷들'은 다윈 이후 200년 넘게 이어진 편협한 과학에 담긴 성차별적 시선을 타파하는 책이다. 도킨스의 제자이기도 한 저자 루시 쿡은 마다가스카르섬, 하와이와 캐나다 등에서 만난 암컷들의 진면목을 그리며 가부장적 편견이 지배해 온 생물학에 일대 혁명을 시도한다.
① 유전자를 적극적으로 간택하는 암컷
'일부일처제'가 없는 자연에서 섹스는 승자독식의 무대다. 암컷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수컷이 가진 A등급 유전자. 짝짓기 철이 되면 산쑥들꿩 세계에선 유혹의 시장인 '레크'가 열린다. 산쑥들꿩 수새는 암새에 간택받기 위해 필사적이다. 건강한 몸으로만 할 수 있는 버거운 춤을 죽어라 춘다. 힘겨운 구애가 끝이 아니다. 암새는 수새에 미묘한 신호를 보내며 훨씬 더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수새의 과시를 만들어낸다. 체력도 좋을 뿐 아니라 '잘 들어야 한다'는 거다. 이를 만족시킨 '딕'은 2014년 시즌에 무려 137번 짝짓기를 했다.
② 성적으로 방종한 암컷
평생 생산할 수 있는 난자의 수가 제한되어 있어 암컷은 '신중하고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진화생물학자들은, 암사자가 발정기 중 다수의 수컷과 하루에 최대 100번까지 짝짓기를 한다는 사실을 알면 까무러칠지도 모르겠다. 그들 인식 속 암컷은 수컷에 종속된 존재일 테니. 번식 기간 검은머리박새 암새의 정사 중 70%는 소위 '혼외정사'였다. 침팬지 암컷은 다섯 마리 새끼를 낳지만 수컷 수십 마리와 6,000번 이상 교미를 한다. 수정할 난자가 없어도, 심지어 임신을 했어도 유혹은 계속된다. 성적 해방은 암컷들의 영리한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더 나은 유전자를 선택하는 수단이 될 뿐 아니라, 친부가 누군지 모르게 혼동을 줘 수컷의 영아 살해 위험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할 수 있다. 그뿐인가. 자기 자식일지도 모르는 일말의 가능성은 수컷들을 공동 양육에 참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③ 수컷에 대항해 단결하고 연대하는 암컷
히말라야원숭이와 버빗원숭이에서 '알파 수컷(집단에서 가장 높은 서열을 가진 수컷)'은 권력을 잡기 위해 집단에서 브레인 역할을 하는 '알파 암컷'의 지지를 받는 것이 필수적이다. 수컷이 신체적으로 우위에 있을지언정, 실질적으로는 암컷이 무리의 지휘권을 갖고 있는 것이다. 평화로운 성향의 보노보 암컷 역시 공격적인 수컷을 제압하기 위해 서로 뒤를 봐주면서 연합한다.
책에는 별별 암컷이 다 나온다. 일부일처제인 알바트로스의 3분의 1은 사실 레즈비언이다. 수컷에게 정자를 기증받고서는, 다른 암컷과 짝을 짓고 산다. 더 이상 수컷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개체도 있다. 톱상어는 자신을 복제하며 개체 수를 늘린다. 기후변화로 번식할 수 없게 되면서다. 청둥오리는 원치 않는 교미의 임신 가능성을 차단하는 능동적인 질 구조를 가졌다.
'세상에 암컷만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현대 생물학은 암컷을 소외시킨 채 발전해 왔다. 유명 자연사 박물관에 박제되어 전시된 표본은 철저히 수컷 위주다. 여전히 과학은 남성을 표준으로 본다. 그러나 저자가 전 세계를 누비며 살핀 동물의 세계에서 성은 정적이지도 고정적이지도 않고 여러 상호작용과 우연으로 변하기도 한다. 성전환을 하거나, 간성(intersex)인 생물도 있다. 성을 차별적인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백인 남성 진화생물학자들이 독점한 지식 권력은 반드시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러한 파란의 시작이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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