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만난 ‘경주’, 그리고 새로운 전주의 발견[이즈미 지하루 한국 블로그]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서경대 글로벌비즈니스어학부 교수 2023. 5. 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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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서경대 글로벌비즈니스어학부 교수
지난주 두 고양이에게 집을 맡기고 전주를 다녀왔다. 올해 24번째를 맞이하는 전주국제영화제. 옛 도시의 아름다운 향기 속에 좋은 영화와 편안한 휴식을 만날 수 있어 늘 즐거움을 준다.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가게 된다.

올해는 그곳에서 9년 만에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2014년)를 스크린으로 만나 무척 반가웠다. 실은 내가 일본인 관광객으로 아주 짧게 등장하는 등 추억이 담긴 작품이다.

‘경주’는 제목 그대로 경북 경주시가 무대다. 선배 문상으로 한국에 온 북경대 최현 교수(박해일 분)가 옛 추억을 따라 경주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일어난 하루의 이야기다. 특히 찻집 아리솔 주인 윤희(신민아 분)와 밀고 당기며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감을 일으키고, 크고 작은 웃음을 자아낸다. 영화를 보는 동안 이 두 사람을 둘러싼 각각 색깔 있는 주변 인물들, 자연스럽게 고도 경주에 녹아든 그들의 연기가 시간과 공간을 잇게 만들었다. 이곳이 경주인지 전주인지 착각하게 했다.

이번 영화제에서 ‘경주’를 볼 수 있던 것은 백현진 씨 덕분이다. ‘경주’는 ‘J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인 그가 선택한 7편의 영화 중 하나로, 본인이 출연하거나 연출한 작품 ‘뽀삐’, ‘디 엔드’, ‘영원한 농담’ 등을 사람들이 많이 접하지 못한 것 같아 함께 나누고픈 마음에 선정했다고 한다. 영화 ‘경주’에서 백현진 씨는 꼰대스러운 북한학 교수로 출연했고, 영화음악가 방준석 감독과 함께 작업한 삽입곡 ‘사랑’을 부른다.

“텅 빈 마음으로 텅 빈 방을 보네, 텅 빈 방 안에는 텅 빈 니가 있네/텅 빈 니 눈 속에는 텅 빈 내가 있네, 아무도 모르게 너와 내가 있네 지금(하략)”

노래를 듣고 있으면 도시 곳곳에 사람들의 삶과 공존하는 커다란 능이 보이는 듯하고, 유백색의 둥근 달항아리가 보이는 듯하다. 장률 감독의 작품에는 동아시아 한중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품어져 있어 ‘경주’ 또한 커다란 세계 속에 존재하는 나를 보게 해준다. 요즘 화제인 인공지능도 감독님의 영화를 이해하기는 아직 멀겠다 할 수 있다.

올해 전주에서 ‘경주’를 만났지만, 사실 내게 영화 ‘경주’는 전주에서 시작됐다. 첫 연출작 ‘당시’가 전주에 소개됐을 때 감독님을 만났고, 이후 ‘풍경’이 전주에 초청됐던 해에 인터뷰했던 남편을 통해 ‘경주’의 출연 제의를 받았던 것이다.

그의 작품은 난해하기도 하지만 늘 가슴에 울림을 준다. 동아시아 속에 사는 인간들의 섬세하고 복잡한 감성을 우리에게 숙제처럼 화두를 던진다. 고도 경주의 매력,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사람, 오고 가는 사람들의 섬세하고도 복잡한 감정을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며 매력적으로 그려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공간은 다르지만 옛 도시 전주와도 어딘가 맥이 이어진다. 더욱이 9년 전 개봉한 작품이지만, 바로 올해 제작한 작품처럼 조금도 낡아 보이지 않는다.

영화 ‘경주’에서 극중 박해일 배우는 자전거를 빌려 경주의 거리를 바람을 가르며 달린다. 그처럼 자전거를 타고 전주를 다니고 싶어졌다. 마침 영화제를 찾은 관객들에게 자전거를 빌려주는 이벤트가 있어 이틀간 자전거로 전주를 돌아다녔다. 자전거를 타기에 길이 울퉁불퉁한 곳이 많았지만, 한옥마을을 지나 전주천 오목교를 건넜다.

이윽고 자전거를 타기 쉬운 길이 나타났다. 동시에 복잡한 관광객들에서 벗어나 사람의 냄새가 나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은 ‘서학동 예술마을’이었다. 전주교대와 인접한 작은 마을은 소소하고 아름다웠다. 연휴여서인지 열려 있는 가게는 많지 않았지만 벽화 하나하나, 문패 하나하나가 그곳의 품위를 느끼게 했다. 이 마을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흥분되기도, 차분한 마음에 편안해지기도 했다.

작은 골목길, 담벼락에 타일로 만들어진 예쁘고 재미난 그림들. 그리고 각양각색 작가들의 작업실들이 이어져 있었다. 골목에서 학교로 이어져 학생들이 드나드는 듯한 작은 구멍(?)도 재미있었고, 학교 공간을 그득 채운 신록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바라보는 내 눈에 휴식과 안정을 안겨줬다.

특히 이웃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관리하는 ‘구름정원’은 어릴 때 아버지가 꾸며준 내 집 마당 같았다. 실내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구름나라’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전주를 떠나 서울에 돌아왔다. 이번 영화제에서 오랜만에 ‘경주’를 만났고, 새로운 ‘전주’를 만나 기뻤다. 특히 새롭게 만난 전주의 작은 마을은 나의 미래와 이어질 것 같다. 일 년 후, 내년에 찾아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계속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두근거린다.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서경대 글로벌비즈니스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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