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43] 루스벨트의 비전
1930년대에 들어서자 1차 대전 이후 일시 평화를 되찾았던 국제 정세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으로 대표되는 파시즘 세력의 발흥은 ‘베르사유·워싱턴 체제’에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에도 미국의 여론은 여전히 전통적인 ‘고립주의’에 편향되어 있었다. 유럽과 아시아의 정세는 남의 일로 치부되었고, 미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개입주의’는 설 자리가 좁았다.
중일전쟁 발발 3개월 후인 1937년 10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시카고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이러한 분위기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 ‘격리 연설(Quarantine Speech)’로 알려진 이 연설에서 그는 일부 호전적 국가들이 야기하는 무법 상황을 ‘전염병(epidemic)’이라 부르며 국제적 격리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방관자적 태도에서 벗어나 법질서 회복과 주권 존중, 안전, 번영을 위해 미국이 필요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그의 비전을 직접적으로 전한 최초의 연설이라고 할 수 있다.
파시즘에 대한 통찰과 미국의 역할에 대한 신념이 담긴 연설이었으나, 미국 내 반응은 좋지 않았다. 오히려 불간섭주의자들의 반발과 정치적 공세로 루스벨트 행정부가 궁지에 몰릴 정도였다. 그러나 몇 년 뒤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루스벨트의 판단이 옳았음을 극명하게 입증하였다.
돌이켜보면 2차 대전 후 미국이 재편한 국제 질서에서 한국만큼 혜택을 입은 나라도 없다. 한국의 독립과 번영이야말로 격리 연설에 담긴 비전이 현실로 구현된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 제목은 ‘자유의 동맹, 행동하는 동맹’이었다. 당시 방청석에서 터진 수십 차례의 기립 박수는 누가 봐도 단지 의례적인 것이라고 보기 힘든 인상적인 호응이었다. 루스벨트의 비전이 역사에 체화된 나라가 높은 수준의 동맹 파트너로 성장하여 전하는 감사와 약속의 메시지였기에 그를 접하는 미 의원들의 감회도 남달랐던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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