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경찰 마치고 제주에 ‘책 사랑방’ 열었다
“그동안 사건에 파묻혀 살았다면, 앞으로는 책에 파묻혀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탈주범 신창원(1999년)과 연쇄살인범 정남규(2006) 등 숱한 강력 사건에서 여성 특유의 직감과 꼼꼼한 분석으로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를 찾아내며 한때 ‘강력계 여경의 전설‘로 불렸던 박미옥(55)씨가 책방 주인으로 변신했다. 재작년 33년의 경찰 생활을 마무리하고 제주 구좌읍에 ‘책방’을 열었다. 책을 파는 서점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다. 책방엔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그는 “명예퇴직 후 살 집을 지으면서 3000여 권 책을 꽂는 25평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고 했다.
박씨는 1987년 19살에 순경으로 시작해 1991년 경찰이 최초로 강력계 여자 형사를 뽑을 때 21명 중 1명으로 선발됐다. 단기간에 경장(1992)·경사(1996)·경위(2000) 특진을 거듭했고 서울 강남경찰서 최초 여성 강력계장을 지내는 등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지난달 30일 책방에서 만난 그는 “형사 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오래전 마약사범으로 잡혀온 한 남자를 조사했을 때다. 면회 온 큰형이 ‘아직도 그렇게 힘드니’라고 말을 건네는 것을 봤다. “보통 마약하다 잡힌 사람들은 가족들한테 ‘집안 망신 시킨다’는 말을 듣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은 달랐어요. 알고 보니 약혼자가 전(前) 애인한테 살해당하는 피해를 당했더라고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조사를 끝내고 남자를 검찰로 보내며 박씨는 “어떻게든 또 다른 의미 있는 것을 찾으면 좋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몇 년 뒤 강원도의 한 스키장에서 그 남자를 우연히 마주쳤다. 보통 조사받은 사람들은 형사를 외면하는데, 그는 반갑게 달려와 인사했다. “그때 내가 이 사람을 쉽게 여기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의 마음을 골똘히 들여다보는 것은 형사의 숙명이다. 덕분에 탈주범 신창원 수사 때 범인이 외로움을 달래려 티켓 다방을 또 찾을 것이란 점에 주목해 수사 초점을 티켓 다방 직원에게 맞췄다. 실제로 신창원은 다방 직원의 고향에 은신해 있다가 검거됐다. 그래서일까. 그가 직접 선별해 가져다 놓은 책 중에는 철학, 삶과 죽음, 정신 분석 등에 대한 책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물론 현재 구비된 3000여 권 책의 구성은 그림책부터 인문학, 에세이까지 훨씬 다양하다.
그는 “오래된 출가(出家)의 꿈을 책방에서 이루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절을 찾아간 적도 있다. 38세 때였다. “사건 수사를 거듭할수록 내가 접하는 이 수많은 죽음이 다 무엇인가 생각했죠. 그런 마음의 결핍과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는데, 이루지 못했어요.”
그는 “범죄 현장에서 본 현실은 너무 잔인했고 책에서 위로를 얻었다”고 했다. 최근엔 형사 시절의 경험을 담은 첫 책 ‘형사 박미옥’(이야기장수)도 썼다. 그는 “마음 아픈 사람, 관계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책방을 찾아온다”고 했다. 그는 “형사는 결국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직업”이라면서, “한둘씩 찾아오시는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보면 책방이 내 형사 인생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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