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 전부터 全회차 매진… 연극 ‘벚꽃 동산’ 연습 현장도 뜨거웠다
“뭔가 많아졌어. 여러 번 하다 보면 뭘 하는지 알고 있다고 확신하기 쉬워요. 그걸 경계해야 해. 지금 무거워. 가벼워져야 돼.”
3일 오후 서울 명동예술극장. 안톤 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연습하던 무대 위 배우들이 멈춰 서서 연출자인 국립극단 김광보(58) 예술감독에게 귀 기울였다. 개막(4일)을 하루 앞두고 그동안 연습해온 극 전체를 점검하는 중. 선문답 같은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배우들이 무대 위 제자리를 찾아갔다. 객석 조명이 꺼지고 다시 극이 흐른다. 대사도 작은 몸짓과 손짓도, 확실히 방금 전에 비해 경쾌하고 가볍다. 세밀하고 놀라운 변화다. 완성 직전 무대 연습은 늘 마법 같다.
28일까지 20회차 모든 공연은 이날 이미 전석 매진됐다. 국립극단 작품으로서도 흔치 않은 일. 김광보 예술감독의 생애 첫 체호프 작품 연출인 데다, 아름다운 벚꽃 동산의 주인인 몰락 귀족 라네프스카야 역을 배우 백지원(50)이 맡은 것도 기대를 키웠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박은빈)를 고용한 법무법인 대표였던 배우. ‘벚꽃 동산’으로 5년 만에 무대에 돌아왔다. ‘티켓 파워’를 실감하느냐 묻자 그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리가요. 연출님과 국립극단, 체호프의 힘이겠죠. 전 제 얼굴 들어간 포스터가 대학로까지 붙은 것도 동료 배우들이 말해줘서 안 걸요.”
백지원은 김광보 감독과 이번이 아홉 번째 작품이다. 같은 극단 소속도 아닌데 매우 드문 경우. 김 감독은 “희곡을 읽으며 라네프스카야는 딱 백지원이라고 생각했다. 1년여 전부터 제안해 일정을 맞췄다”고 했다. “자신만의 아우라, 독특한 품격과 분위기를 가진 배우예요. 배우의 아우라는 대사와 무대 위 모습의 이면에 무엇을 담을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그 깊이는 개인의 일상, 삶에 대한 태도와 성실성에서 오죠. 백지원에겐 그런 깊이와 아우라가 있습니다.” 백지원도 김광보 연출과 이번 연극을 함께 하기 위해 영화와 드라마로 빡빡한 스케줄에서 3~5월 석 달을 뺐다.
‘벚꽃 동산’의 배경은 농노해방령(1861) 이후 세습 귀족이 몰락하고 신흥 자본가가 성장하던 제정 러시아. 백지원이 맡은 귀부인 라네프스카야는 빚더미에 앉은 채 고향 저택으로 돌아오지만, 시대가 바뀐 줄도, 소중한 것들을 지킬 방법도 모른다. 백지원은 “영화·드라마나 연극에서나 내가 아는 인물 접근법은 하나다. 함께 대본을 읽고 의견을 모아 극 전체를 보면서 인물을 창조해 가는 것”이라고 했다. “라네프스카야는 현실에서 도망가는, 그럼에도 사랑을 좇는, 그리고 벚꽃 동산이 상징하는 끝까지 지키고 싶은 가치를 갖고 있는 여자예요. 그 얼굴을 압축해 보여드리려 합니다.”
‘바냐 아저씨’ ‘갈매기’ ‘세 자매’와 함께 안톤 체호프의 4대 희곡 중 유작인 이 작품에서, 벚꽃 동산은 미래를 저당잡힌 구(舊)세대가 안주해온 구(舊)체제의 상징처럼 보인다. 오래된 것들은 무너지고 아름다운 벚꽃 동산들의 벚나무들도 베어져 나간다. 자신들이 믿던 세상이 무너졌다는 걸 겨우 받아들이는 이도, 끝내 인정하지 못하는 이도, 앞장서 적응해 가는 이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혼란의 폐허를 딛고 서서, 젊은 세대는 그들 만의 방식으로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것이 또 다른 폐허의 시작이라고 해도.
김광보 감독은 “체호프는 일상의 소소한 관계와 역학 속에 아무 것도 없는 듯하지만 실은 굉장히 많은 것을 담는다. 그 때문에 연출도 연기도 어렵지만 관객은 느낀 만큼 더 많은 것을 가져갈 수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사람마다 각자의 길이 있지요. 이 연극 속 각양각색 인간 군상 중엔 관객 자신의 모습도 투영돼 있을 겁니다. 이 작품을 본다는 건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인생을 돌아보는 것과 같은 경험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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