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어린이날에 생각해 보는 주어

기자 2023. 5. 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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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할아버지가 된 지 오래되었다. 큰조카가 벌써 두 아이의 엄마다. 집안의 첫 손자에게 나는 ‘바보’ 할아버지로 통한다. 반포에 살았던 나를 택호처럼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나를 바보로 만든 그 손자가 초등학생이 된 게 엊그제 같더니 곧 대학교에 입학할 나이란다. 아니 벌써! 라고 나는 쉽게 말하지만 아이 엄마에게는 그게 아닐 것이다.

문득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첫째가 놀이방에 다니고 둘째가 엉금엉금 기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어느 일간지 사회면에서 짤막한 기사를 읽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첫 단어가 ‘나, 너, 우리’로 바뀐다는 내용이었다. 아니 이게 뭔 기삿거린감! 하려다가 얼른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것은 신문이라면 꼭 다루어야 할 대단히 가치 있는 뉴스였다. 거창하게 시대정신이나 교육이념 따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 어린이에게 한 사회가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첫 언어는 무척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수한 옹알이 끝에 ‘어머이’ ‘아부지’를 먼저 발음했겠지만 시골 초등학교에서 처음 배우고 읽으며 연필로 써보았을 나의 첫 단어가 궁금해졌다. 광복 직후에는 ‘바다, 나라, 가자’였다. 1963년부터는 좀 길어졌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이리 오너라.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나하고 놀자. 순이야 이리와. 나하고 놀자.’ 유신 이후인 1973년에는 ‘나, 너,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이었다. 그리고 1993년에 바뀌었다. ‘나, 너, 우리.’

첫 단어는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인 것에서 ‘나’라는 구체적 개인으로 확고해졌다. 그 와중에 폭력을 합법적으로 지니면서 한때 과도하게 행사하였던 ‘나라’는 슬며시 사라졌다. ‘바둑이’까지 첫 단어로 배워야 했을까. 이제야 옛날의 서당에서 외웠을 ‘하늘 천, 따 지’에 비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 너, 우리.’ 이는 사회구성원으로서 한 인간의 위치를 삼각형처럼 명확하게 보여준다. ‘나’란 천하에 주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너’ 없이 그것은 안 된다는 것.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어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이 세상은 주어가 없는 곳이 절대 아니다. 이제 어린이들은 자신만의 동사로 서술어의 빈칸을 채우면서 생을 완성해 나갈 것이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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