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재판의 실패' 부른 사법행정

2023. 5. 5.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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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지연, 국가사회적 피해 심각
일할 동기 없앤 법관 인사제도 탓
유럽처럼 신속간이절차 도입 등
2차선 도로 수준 낡은 사법제도도
10차로로 넓히고 병목 없애야
김종민 변호사·前 광주지검 순천지청장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누적된 재판 지연 문제가 심각하다. 2021년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1심 형사 합의 사건은 접수 건수가 줄었음에도 미제가 2017년에 비해 약 40% 증가했다. ‘악성 미제’로 불리는 2년 초과 사건도 80%가량 급증했다. 민사 합의 사건의 2년 초과 미제는 2016년에 비해 2배 이상 늘었고 민사 항소율도 2021년 44%를 기록했다. 사건 처리의 양과 질 모든 면에서 나빠졌다. 재판의 실패가 아닐 수 없고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국가사회적 피해와 함께 사법의 신뢰 손상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재판 지연 문제는 사법 행정과 제도 모두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법 행정과 관련해서는 법관 인사제도가 가장 문제다. 고등법원 부장 승진제도가 폐지되고, 소속 판사의 투표로 뽑는 법원장 추천제를 무리하게 추진하다 보니 우수한 판사가 더 열심히 일할 동기가 사라졌다. 과거에는 지방법원 부장 중에서 실력이 뛰어난 법관을 고등법원 부장으로 승진시켰고 대법관도 최고의 실력과 인품을 갖춘 법관 중에서 임명했는데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이념과 성향을 같이하는 특정 그룹 중심의 코드 인사로 시스템이 무너졌다. 법원장 추천제 도입 이후 내부 평판을 의식해 엄격한 지도와 사건 관리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법원행정처가 문제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아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지적도 법원 내부에서 제기된다. 매년 사법부의 모든 통계를 분석자료와 함께 보고받는 대법원장이 재판 지연 문제에 주도적으로 대처했어야 하는데 전국법원장회의 등을 통해 심층적으로 논의한 흔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사법행정자문회의로 인해 사법행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그사이 대법원 재판연구관이나 법원행정처 등 요직을 거친 중견 법관이 대거 사직하고 로펌행을 택했다.

급격히 변화하는 환경과 제한된 사법 자원을 고려하지 못한 낡은 사법제도도 문제다.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연구원은 2022년 1월 발표한 <법관 업무 분담 및 그 영향 요인에 관한 연구>에서 법원 사건의 적정 처리를 위해 판사 680~980명의 증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작년 12월 판사 370명을 5년간 증원하는 판사정원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지만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재판이 획기적으로 개선된다는 보장이 없고 무엇보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법정과 사무공간, 직원도 함께 늘려야 하는데 예산은 물론 부지 확보부터 쉽지 않다.

1심 판결에만 3년2개월이 걸린 조국 전 장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형사재판 지연 문제는 우려할 수준이다. 금융 범죄와 기업 범죄 급증, 공판 중심주의와 검사 작성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 제한은 재판 장기화를 가속화하고 국가 형벌권의 효과적 집행과 범죄 피해자 구제를 어렵게 한다. 재판 적체로 고민하던 유럽은 1990년대부터 법경제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정식 재판할 가치’가 있는 사건만 공판 중심주의 방식으로 하고 나머지는 신속간이절차로 처리하고 있다. ‘협상사법’(justice ngoci) 시스템을 통해 증거가 충분한 자백 사건은 판사의 승인 절차로 대신한다. 2004년 미국식 ‘플리바게닝’(유죄협상제)을 전면 도입한 프랑스가 대표적이다. 입법 당시 법조계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으나 2021년 기소 가능 사건 중 32.5%를 이 절차로 처리하며 ‘막힌 하수구’를 뚫는 데 성공했다.

사법은 무엇보다 효과적이어야 한다. 한비자는 “일이 많은 시대에 살면서 일이 적던 시절의 그릇을 사용함은 슬기로운 사람의 대비책이 아니다”고 했다. 법과 사법제도의 많은 부분이 과거 산업화 시대에 맞춰 설계한 왕복 2차선 도로다. 2019년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우리는 13위를 기록했지만 분쟁 해결을 위한 법 제도의 효율성은 45위다. 국가 경쟁력의 발목을 잡는 낡은 제도를 변화한 시대와 환경에 맞춰 왕복 10차선 도로로 넓히고 병목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9월 임명될 신임 대법원장의 최우선 과제는 사법부 정상화다. 그중에서도 신속한 재판을 위한 사법개혁이다. 인사 혁신으로 실력 있는 판사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고 유럽에서 보편화한 신속간이절차 등을 참고해 사법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제도개혁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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