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길을 묻다] 비정규직·노동시간 굴레에 갇혀…돈과 일에 매몰된 한국 사회

기자 2023. 5. 4.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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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최악으로 가는 고용과 노동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인간문제로 비정규직 고용형태가 존재한다
한번 비정규직이 되면 전 생애, 또는 거의 전 생애를 비정규직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다
더욱더 심각한 문제는 여성이 남성의 두 배에 달하는 비정규직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정규직은 더 많이 벌려고 야근하고 있고, 비정규직은 최소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에 매여 있다
한국인은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산다는 표현이 잘 들어맞는다
공동체 정신을 혁명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개별 삶들의 모습은 바뀌기 어렵다

빛의 속도로 발전해온 한국 사회가 낳은 깊고 깊은 어둠 중의 하나는 삶의 ‘비정규화·차별화·불안화’이다. ‘안정’이란 의미가 ‘국가 안에 살다’라는 말에서 연유하였음을 고려할 때 국가의 빠른 발전과 수많은 개별 삶들의 비정규화·불안화의 심화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역진 현상이다. 요컨대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인간 문제로 비정규직 고용형태가 존재한다. 이 문제는 계층 불평등, 성 불평등, 지역 불평등과 함께 한국적 삶의 차별과 불안정을 초래하는 4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노동·고용·계약 형태로서의 비정규직 문제는 인구 비율과 삶의 질 차이에 비추어 과거 전통시대의 농노제나 건국 전후의 소작제에 근접할 정도로 비인간적이며 불안정한 인간생태이자 삶의 생태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결론부터 말하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러한 비인간적인 차별제도를 단호히 끊어낼 때의 전 사회적 대(大)결단과 대타협과 대돌파가 절실하다.

비정규직 문제는 단순한 경제적 수입 규모나 특정 고용·노동 양태의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한 작업장 내에서 그들과 고용주 및 정규직들과의 관계는 너무도 예종적이며 비인간적이다. 수입 규모뿐만 아니라 나날의 일상과 마음의 상처에서도 그러하다.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그의 자녀들은 삶의 안정과 예측 가능성에 기반한 장기적 계획을 세우기가 어렵다. 결국 비정규직 문제는 국가의 경제 발전과 기업의 이익, 정규직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일부의 희생을 강요하는 근대적 계약 관념과 인간관계, 인간 실존조차 파괴하는 악성 제도이자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개별 인간 실존의 자존감과 자율성, 주체성과 대등성은 이러한 전근대로의 가공할 회귀를 얼마나 빨리, 얼마나 철저하게 극복하느냐의 문제에 직결돼 있다.

비정규직 비율 미국의 7배 근접

비정규직에 관한 주요 통계부터 살펴보자. 통계에는 숫자를 넘어 한 사람 한 사람의 땀과 눈물, 기쁨과 비애가 담겨 있다. 그 땀과 비애가 합쳐져 한 삶을 이루고, 그 하나하나 삶들이 모여 인간공동체를 이룬다. 먼저 임금근로자의 3분의 1을 넘는 비정규직은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03년 32.6%이던 비정규직 비율은 2021년과 2022년 각각 38.4%, 37.5%로 증가했다. 그런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두 배를 넘는다. OECD 발표를 보면 2021년 한국은 28.3%인데 OECD 평균은 절반 한참 아래인 11.8%에 불과하다. 한국은 가장 높은 비정규직 비율 국가의 하나다. 즉 고용의 질이 가장 나쁜 나라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 비록 기업과 시장의 논리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지만 통계가 보여주듯 OECD 국가들 대부분은 비정규직 비율이 높지 않다. 실제 비정규직 비율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매우 낮다. OECD 국가 중 비정규직 비율이 20%를 넘는 나라는 스페인·칠레·네덜란드·한국·콜롬비아 정도에 불과하다. 보수담론과는 반대로 한국을 제외하고는 네덜란드 이외에 모두 경제 발전과 복지에서 전혀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나라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보수담론과는 반대로 비정규직 비율이 높아서 경제가 오히려 안 좋은 것은 아닐까 묻게 된다. 물론 이 문제는 일반화하기 어렵다. 21세기 초 신자유주의의 선두주자로 평가받은 미국과 영국조차 2005년 기준 비정규직 비율은 4.2%와 5.8%에 불과해 당시 한국(27.3%)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여성이 남성의 두 배에 달하는 비정규직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훨씬 열악한 노동조건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격차는 줄어들지 않고 외려 확대되고 있다. 2003년 남성 대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27.6% 대 39.6%였으나 2021년과 2022년에는 31% 대 47.4%, 30.6% 대 46%로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남성과 여성 모두 비정규직이 확대되는 가운데 여성은 절반가량이 비정규직인 것이다. 여성들은 비정규직이 많은 데다 성별 고용률에서도 현저히 나쁘다. 이 문제 역시 개선될 기미가 없다. 20년 동안 남녀 고용률은 2000년 70.8% 대 47.0%에서 2021년 70.0% 대 51.2%로 큰 변화가 없다. 여성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는 사실상 중첩돼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이 장기적인 고용형태로 고착된 가운데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에 비해 점점 더 하락하고 있다. 최근 들어 지표는 더욱 나빠지고 있다. 2004년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상대임금은 65.2%였으나 2021년과 2022년에는 53.0%와 54.1%로 나빠졌다. 실제 2022년 현재 정규직(348만원)과 비정규직(188만1000원)의 임금 격차는 159만9000원으로 역대 최대로 벌어졌다. 최대는 곧 최악을 의미한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임금을 거의 절반밖에 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시간제 노동자는 임금을 정규직의 약 4분의 1밖에 받지 못하고 있다.

2022년 기준 전체 근로소득자의 평균 연봉은 4024만원이다. 억대 연봉자는 112만3000명에 이른다. 5억원 이상은 1만7000명이다. 최근 들어 고액 연봉자 규모는 급증하고 있다. ‘국가경제의 급속한 발전’ ‘고액 소득자의 급증’ ‘평균 연봉 4000만원 최초 돌파’ ‘비정규직 규모 증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격차 역대 최대’ 등 같은 국민과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는 이 지표들 사이의 통계적·인간적 함수관계를 깊이 읽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근속기간조차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3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 2021년과 2022년 현재 정규직 대 비정규직은 근속기간이 96개월 대 29개월, 97개월 대 30개월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평균 2년 반에 한 번씩 직장을 바꿔야 할 만큼 근속기간이 짧다. 게다가 고용계약은 2020년 기준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56.1%가 1년 이하 초단기간이었다. 그 숫자는 무려 417만명에 달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얼마나 불안정한 고용구조에 놓여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초단기 근로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도 불안정한 계약기간이자 너무도 불안정한 삶들이다.

EU보다 연평균 400시간 더 일해

정규직은 세계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비정규직은 최단 계약기간으로 고통을 받는, 객관적으로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노동시장 구조는 반드시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다른 세계와의 비교를 보자.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악성’인지를 알 수 있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가장 높은 수준의 비정규직 비중도 문제려니와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조차 조사 대상 국가들 중 가장 낮다. 2013년 기준 룩셈부르크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1년 후 정규직 노동자로 전환되는 비율은 58.7%였다. 27.9%는 비정규직으로 머물렀고, 13.4%는 실업 상태로 전환했다. 3년 후에는 정규직 전환율이 79.7%였다. 1년 후에는 10명 중 6명, 3년 후에는 10명 중 8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독일·영국·핀란드는 1년 후 정규직 전환율이 각각 46.6%, 51.9%, 31.2%였고, 3년 후에는 60.0%, 63.4%, 44.7%였다.

반면 한국은 1년 후 정규직 전환율이 11.1%, 3년 후 정규직 전환율은 22.4%에 그쳤다. 한마디로 한국은 한 번 비정규직이 되면 1년 후 10명 중 1명, 3년 후 10명 중 2명만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나머지 9명, 8명은 여전히 비정규직이거나 실업 상태이다. 한 번 비정규직이 되면 80~90%는 생애 내내 그러한 고통 상태를 지속하게 되는 셈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거의 절망적인 ‘신분 고착 사회’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 번 비정규직이 되면 전 생애, 또는 거의 전 생애를 비정규직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다.

절반에 불과한 건강보험 가입률 역시 그 차이가 거의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것은 고용형태가 질병 치료 (불)가능성에까지 직결되는 사회 현실을 보여주는 무서운 지표다. 게다가 비정규직들은 임금 자체가 너무도 적다. 노동 형태와 수입 규모가 곧 건강이고 생명인 가공할 사회가 된 것이다. 노동조합의 결성도 불가능하다. 2021년 정규직 노동자들은 18.4%의 노조 조직률을 보이고 있으나 비정규직은 3.3%에 불과하다. 이래서는 어떤 요구 조건도 관철시키기가 어렵다. 이들을 보호할 어떤 독자적인 체계적 장치도, 조직도 없는 것이다.

한국 노동자들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정말 길다. 한국 대 OECD 국가 평균은 1980년 2864시간 대 1888시간부터 출발해 1990년 2677시간 대 1877시간, 2000년 2512시간 대 1844시간을 거쳐 2021년에는 1915시간 대 1716시간을 나타냈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은 OECD 국가 평균보다도 훨씬 더 짧다. 2021년 한국 대 EU 14개국(영국 탈퇴)의 평균 노동시간은 1915시간 대 1536시간이다. 한국은 독일·덴마크·네덜란드 노동자들에 비해 연평균 400시간가량 더 일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2011년까지는 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이 가장 긴 국가였다. 2012년부터는 멕시코가 1위를 기록하고 있고, 한국은 2~4위에 오르며 최장 노동시간 국가의 하나로 남아 있다.

한국의 정규직은 더 많이 벌기 위해 야근하고 있고, 비정규직은 최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에 매여 있다. 하루의 삶과 노동의 구성에서도 한국인들은 거의 돈의 노예가 돼 있는 것이다. 아래 통계를 보면 한국인들은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산다”는 표현이 잘 들어맞는다. 이것은 문학적 은유가 결코 아니라 엄중한 현실이다. 2021년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 남성 노동자들은 돈을 받는 노동과 공부에 하루 419분(OECD 국가 평균 317분)을 쓰지만, 돈을 받지 않는 일에는 하루 49분(OECD 국가 평균 136분)을 사용할 뿐이다. 전자는 100분 정도가 많고, 후자는 100분 정도가 적다. 또 가사노동에는 단지 41분(OECD 국가 평균 108분)만을 쓴다. 셋 모두 OECD 국가 평균과는 차이가 커도 너무 크다. 비율로 나타내면 돈을 받는 일과 가사노동 사이는 OECD 국가 평균 0.34 대 한국 0.10이다. 한국은 3분의 1도 안 되는 셈이다. 덴마크는 0.57, 스웨덴은 0.46, 미국은 0.36이다.

한국인의 삶이 돈에 결박돼 있고, 노예성을 갖고 있는지 자체 비율로 대비해 보자. 완벽하게 돈의 노예가 돼 너무도 불쌍한 한국적 삶의 하루 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수치다. 돈을 받는 일과 돈을 받지 않는 일, 가사노동을 수치로 비교하면 충격적인 비율이 나온다. 덴마크는 1.7 대 1.2 대 1이다. 덴마크인들은 하루 중 돈을 받는 일을 가사노동의 1.7배 하며, 돈을 받지 않는 일은 1.2배 하고 있다. 차이가 크지 않다. 스웨덴인들은 2.2 대 1.2 대 1이다. 역시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 OECD 30개국 평균은 2.9 대 1.3 대 1이다.

한국은 어떨까? 압도적으로 돈을 받는 일 중심이다. 비율은 10.2 대 1.2 대 1이다. 이렇듯 큰 차이를 나타내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돈을 벌기 위해 세계 최장 시간 일을 하느라 봉사나 취미를 포함해 돈과 관련없는 일이나 가정에는 충실할 수 없는 현실이 수치로 드러나 있다.

서열·등위 관심에 삶의 고통 묻혀

평균적인 한국 남성들은 하루를 거의 돈벌이에 매달리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의 인생 전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불쌍한 한국적 삶의 본질이다. 누가 이런 삶을 살아야만 하는 ‘비인간적인 돈 유일적 금전만능 체제’를 만들었는가? 바로 한국인들 자신이다. 어떤 한국인들은 “돈이면 다냐?”고 묻지만 실제로 거의 모든 한국인들은 “돈이면 다 된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고 굳게 믿는다. 잠시만 눈을 돌리면 돈에 미친 한국인들을 언제 어디서나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완전히 파탄난 급진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론 철학에 가장 충실한 사람들은 우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물질을 향해 전 생애를 걸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잘못된 체제가 강요하는 잘못된 삶이다. 그들은 모두 돈의 노예가 맞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이 벌기 위해, 돈이 적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먹고살기 위해 돈에 매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둘은 성격이 크게 다르지만, 체제 공동성원으로서 한국인들 모두 돈에 꽉 매여 있음은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과연 누가 어디에서부터 이 질곡을 끊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처럼 물질만능의 사회와 국가로 일관해서는 이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와 한국인들은 그저 국내총생산(GDP)이 얼마나 늘어나고, 기업과 상품의 세계 순위가 얼마나 상승했는지, 세계 1등이 몇 개나 되는지에 온통 관심을 갖는다. 그런 전체 서열과 등위에서 내 옆의 삶들의 고통과 눈물은 묻히고 만다.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 나와 우리가 부끄럽고 안쓰럽다.

그렇게 가지 않을 길? 물론 있다. 많은 나라들의 실제 사례를 보라. 그동안의 발전 방향을 깊게 성찰하고 과실을 적절히 나누면 된다. 공동체의 전체 정신과 방향을 혁명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 안의 개별 삶들의 모습은 바뀌기 어렵다. 비정규직을 지금의 4분의 1 또는 3분의 1 이하로 줄이려는 치열한 노력이 가장 확실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박명림 교수



연세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제주 4·3(석사)에 이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박사)로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래 평화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현상 연구에 천착해왔다. 정치학자로서, 역사학자로서 전쟁과 평화, 생명과 인간, 그리고 국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 <다음 국가를 말하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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