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 돌봄 해법 보여주는 부산 ‘동구 어린이식당’
같이, 제철 음식으로 ‘경험’을 먹여라
어린이는 건강에 좋은 신선한 음식을 먹을 권리가 있다. 동시에 혼자 외롭지 않게 누군가와 행복한 한 끼를 함께할 권리도 있다. 어린이의 ‘밥 한 끼’에 관해 오래 고민해온 이들은 음식만큼 중요한 건 음식을 매개로 어린이들을 지탱하는 ‘관계’라고 말한다. 그 관계를 위해선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따라야 한다고도 했다.
2023년 101번째를 맞이한 어린이날에 한국의 어린이는 어디서 누구와 ‘어떤 밥’을 먹고 있을까. ‘굶는’ 어린이는 이전보다 줄었다지만, 여전히 일부 어린이는 편의점에서 혼자 차가운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을지 모른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한 아이를 잘 먹이는 데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
키즈카페는 없지만…부산 산동네에 있는 ‘이것’
2019년부터 산동네 아이들 도시락 담당
규동·스테이크 등 퀄리티는 물론이고
바닷가재 등으로 밥을 체험으로 만들어
“한 끼 넘어 촉각·미각 통한 세계의 확장”
지난달 26일. 저녁 7시를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오자 시끌벅적 뛰어놀던 동그란 머리들이 계단 위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줄지어 선 아이들 옆엔 알록달록한 글자가 수놓인 블랙보드가 있다. “든든한 참치마요덮밥, 놀부 뺨치는 부대찌개, 새콤달콤 오이 초무침, ‘기후위기’를 생각하는 식물성 바나나 우유.” 이날 부산 동구 어린이식당 수정점의 ‘오늘의 메뉴’다. 아이들은 수요일마다 이곳에서 도시락을 받아 간다.
몸집의 절반만 한 도시락 가방을 각자 둘러메고 떠나는 아이들 앞에 땅거미 진 산동네의 풍경이 펼쳐졌다. 부산역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인 이곳 동구는 부산항과도 가까워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모여들었다. 지금도 부산에서 저소득층이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꼽힌다. 큰길로 내려가려면 계단 128개를 거쳐야 할 만큼 가파른 지형과 오래된 아파트·주택들로 가득 찬 골목 탓에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도, 그 흔한 ‘키즈카페’도 이 동네엔 없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부산종합사회복지관은 32년 전 이곳에 터를 잡고 동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돌봄 공간이자 지역 커뮤니티 역할을 해왔다. ‘동구 어린이식당’은 복지관이 2019년부터 운영해온 사업이다. 운영비는 대부분 재단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동구청에서 일부를 지원받는다. 이곳 수정점뿐만 아니라 범일·초량·좌천점 등 동구 4개 어린이식당에서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준다.
어린이식당 실무를 담당해온 배금예 부산종합사회복지관 복지사업2팀 과장은 “ ‘무료급식’이라는 낙인을 주지 않도록 급식의 퀄리티(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도시락 메뉴는 어린이급식관리지원센터에서 받은 식단표를 참고하되 매주 아이들의 선호와 식자재 상황 등을 고려해 짠다. 한 달에 한 번은 순살 생선 등 집에서 따로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식자재 꾸러미도 도시락과 함께 들려 보낸다. 지난해 수정점의 아이들 20명이 매주 먹은 도시락 메뉴는 인도식 커리, 한우 스테이크 덮밥, 규동, 김장김치와 수육, 팝콘치킨 등이다.
“여긴 ‘어린이 전용 레스토랑’이에요”
어린이식당은 ‘먹느냐 못 먹느냐’의 생존을 넘어 ‘경험’을 중시한다. “우리 아이들이 제철 식재료와 식문화에 대한 경험을 하는 것도 엄청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경험을 쌓아야 통찰이 생겨요. 사람은 시각뿐 아니라 촉각과 미각으로도 세계를 확장해 나가잖아요. 그러면 어린아이들일수록 그런 경험의 격차를 해소해줘야 한다고 봐요. 미나리가 제철일 때 미나리 삼겹살을 먹어본 아이와 먹어보지 않은 아이의 경험은 다를 테니까요.” 조윤영 부산종합사회복지관 관장이 말했다. 미나리 삼겹살에 이어 토마토가 제철인 때엔 ‘토마토 카프레세’가 메뉴로 나갔다. 올해 첫 도시락으로 로브스터(바닷가재)가 나온 날엔 집마다 잔치가 벌어졌다. 가재의 생김새가 신기했던 아이들은 처음 먹어본 로브스터를 그림으로도 남겼다. 한 아이는 어린이식당을 “어린이 전용 레스토랑”이라고 불렀다.
‘어린이 전용 레스토랑’이란 표현은 어린이식당이 어떤 공간인지 잘 말해준다. 조 관장은 어린이식당이 ‘결식아동’들이 단순히 밥을 먹는 공간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따뜻한 식사를 매개로 지역의 다른 아이들과 관계를 맺고 경험을 공유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어린이식당에는 ‘매주 도시락을 받기 전 한 시간 동안 꼭 복지관의 놀이공간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아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코로나19 유행 때문에 지금까진 도시락으로 각자 밥을 먹었지만 앞으로 수정점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식당에서 함께 먹기로 했다. 기후변화 식생활 교육과 공예교실 등 다양한 마을 프로그램도 어린이식당 안에서 진행된다.
복지관은 맞벌이나 한부모 등 양육 부담이 큰 가정에서 신청을 받아 어린이식당 손님을 선정한다. 지점별로 20명 남짓이다. 두 자녀를 연달아 어린이식당에 보낸 김현정씨(35)는 “어린이식당에서 밥 먹는 것뿐만 아니라 만들기·놀이 체험을 하면서 얻어오는 물품과 지식을 조잘조잘 자랑하기도 한다”면서 “(어린이식당을 갔다 오는) 수요일만 되면 할 얘기가 많은지, 집에서 대화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 말했다.
이런 ‘관계와 경험’을 쌓는 과정에 지역사회의 수많은 사람이 참여한다. 어린이식당의 음식 조리는 수정점·범일점에서는 지역 주민이자 인근 학교 급식실에서 오래 근무한 조리장이, 나머지 2개 지점은 지역의 자원봉사단체인 ‘좋은엄마공동체’가 맡는다. 이들은 모두 동구에서 아이를 키워냈다. 이제는 고등학생·대학생이 된 자녀들을 뒤로하고 “우리 지역의 아이들은 우리가 같이 돌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린이식당과 함께하고 있다. 도시락 반찬은 지역 시장에서 직접 장을 봐서 만든다. 한 달에 한 번 나가는 식자재 꾸러미는 지역의 협동조합이나 대학 등이 후원한다. 조 관장은 “자원봉사자까지 다 포함하면 (어린이식당에) 100명 정도는 움직일 것”이라고 했다.
굶기지‘만’ 않는 정책의 현주소
급식지원사업, 전국으로 확대됐지만
‘무엇을 어떻게’보다 굶기지 않기에 초점
급식카드 있어도 단가 낮고 가맹점 부족
지역사회 인적·물적 도움 제도화 절실
급식 지원 사업은 1998년 서울에서 처음 시작됐다. 정말 먹지 못해 생존을 위협받는 ‘결식아동’이 사업 대상이었다. 이어 2000년 보건복지부 주관으로 전국에 확대됐다. 2005년 중앙정부에서 지자체로 사업이 이양됐고 2009년 ‘아동급식카드’가 도입됐다.
결식아동 급식 지원 대상은 ‘결식 우려가 있는 18세 미만 취학 및 미취학 아동’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차상위계층, 한부모 가구 등의 아동이다. 지원 규모는 최근 몇년간 30만명대였다가 2022년 기준 28만3858명으로 줄었다. 감소했다고 하지만 아동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감안하면 여전히 적지 않다.
사업이 시작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이들이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먹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아직 부족하다. 급식카드를 사용하는 아이들의 절반은 끼니를 ‘편의점’에서 때운다.
4일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서울시와 경기도에서 제출받은 아동급식카드 사용처 자료를 보면, 지난해 전체 기준 서울에선 편의점이 49.4%로 가장 많았고, 경기 역시 편의점 비중이 46.3%로 가장 높았다. 두 지역 모두 상반기보다 하반기에 편의점 사용이 늘었다.
급식카드의 가장 큰 문제는 낮은 단가와 가맹점 부족이다. 지난해 6월 아동복지법이 개정돼 국가와 지자체가 매년 물가상승률 등을 반영한 급식최저단가를 결정해 이를 바탕으로 하도록 했다. 올해 급식최저단가는 ‘8000원 이상’으로 전년보다 1000원 인상됐다. 그러나 요즘 외식 한 끼가 1만원을 웃도는 걸 감안하면 높은 금액은 아니다. 지원 단가 역시 지자체 예산에 따라 격차가 크다. 가맹점 중 일반음식점 비중이 낮고, 정보가 부족한 것도 이용에 불편을 준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아동이 여전히 편의점에서 한 끼를 때운다.
편의점에서 끼니를 해결하다 보면 영양 균형이 맞지 않는 식사를 하게 되고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동급식카드를 이용한 식생활 경험에 관한 질적연구’(이수진·류호경, 2022년) 보고서에 실린, 중·고등학생 때 급식카드 이용 경험이 있는 20~26세 6명의 심층면접 결과를 보자. 이들은 급식카드를 주로 편의점에서 썼고 김밥, 컵라면, 우유 등을 많이 먹었다.
26세 여성은 “원래 마른 체형에 살이 잘 안 쪘었는데, 카드를 쓰고 나서 살이 많이 쪘던 것 같다”며 “먹었던 음식 대부분이 밀가루가 많이 들어간 것이었기 때문인 듯하다”고 했다. 실제 급식카드를 이용한 아동이 비이용 아동에 비해 비만이 될 가능성이 2배 이상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아동급식카드가 아동의 신체건강에 미치는 영향’, 송지현·김창현·박진호·남재현, 2021년)도 있다.
급식카드 자체가 아이들에게 ‘결식아동’이라는 낙인으로 작용하는 문제도 있다. 급식카드를 갖고 있는 아이들에게 무료로 끼니를 제공하는 ‘선한영향력가게’에 동참해온 유병학씨(36)는 급식카드가 아이들에게 주는 낙인을 옆에서 직접 보고 들었다. “카드 모양 자체가 (일반 카드와) 완전히 다르니까, IC칩도 없고 무조건 마그네틱으로만 결제를 해야 하고. 음식점에서 카드를 줬을 때 아는 분들은 그냥 조용히 결제를 하는데 교육이 안 된 직원들은 ‘이게 뭐냐’ 물어보고 (아이들이) 설명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 학생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너무 서럽다, 내가 가난해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면서 정말 많이 울더라고요.”
‘돌봄’의 핵심은 먹거리…다 같이, 따뜻하게
지자체별로 급식카드의 단점을 개선하기는 했다. 급식 가맹점을 늘리고 카드 디자인이나 결제 방식도 일반 체크카드와 동일하게 바꿨다. 최근 경기도, 경북도 등은 공공배달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이 카드로도 배달음식의 결제가 가능하도록 했다.
아무리 개선이 이뤄져도 여전히 카드 한 장을 들고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조 관장은 “(현재 정책엔) 지역사회의 관계가 빠졌다”며 “ ‘카드만 주면 알아서 먹겠지’라는 생각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서비스만 대상자에게 주는,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인 생각 같다”고 지적한다.
아이들의 먹거리를 서비스가 아닌 ‘돌봄’의 연장선으로 보는 지자체도 있다. 서울 노원구는 2020년 초등학교 방과후 돌봄센터인 ‘아이휴센터’에 아동식당을 열었다. 이 식당은 ‘소득 불문’ 초등학생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밥값은 1000원이다. 이수진 아이휴 부센터장은 통화에서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맞벌이 가구 등 보호자가 저녁을 챙겨주기 어려운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대체식이나 배달음식, 급하게 차린 밥상을 받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누구나 소외감 없이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라며 “센터의 돌봄은 학습이 아니라 휴식을 의미하고, 여기에는 놀이와 함께 먹거리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돌봄의 핵심에 먹거리가 있다.
지역사회 내 먹거리 돌봄에 대해 연구해온 김흥주 원광대 보건복지학부 교수는 ‘제도화’와 ‘지역사회’를 강조했다. 김 교수는 “지자체의 먹거리 기본 조례에 ‘현물 지원’이라는 걸 명시하면 공무원들이 예산을 집행할 때 지금처럼 현금이나 카드를 나눠주는 게 아니라 현물 지원 방식을 찾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고 말했다. 또 “제도화만 필요한 게 아니라 지역과 마을이 같이 움직여줘야 한다”며 “아이들에게 존엄성 있는 밥을 먹이자는 건 동네 어르신부터 시작해 지역사회 전체가 먹거리 돌봄망을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의미”라고 했다.
전북 익산에선 최근 이러한 ‘먹거리 돌봄망’을 조성하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사회적협동조합 ‘청년식당’이 로컬푸드 직매장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도시락을 만들면, 지역 자활센터 참여자들이 아동과 노인, 장애인 등 먹거리 취약계층에 도시락을 배달한다.
아이들의 ‘따뜻한 밥 한 끼’에 대한 투자는 지역의 미래와도 연결된다. 김 교수는 “아이들이 지역에서 언제든지 잘 먹을 수 있는 구조만 만들어지면 맞벌이 부부들도 마음을 놓게 되고, 밥 한 끼를 아이들에게 제대로 제공함으로써 그 한 끼에 얽혀 있는 생산자들과의 관계와 지역의 역사, 꿈과 희망을 보여줄 수 있다”며 “아이들이 지역에 애착을 갖게 되면 지역에 머물게 되고 인구소멸도 막을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생긴다”고 말했다.
민서영·김향미 기자 min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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