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가는 모든 길이 스쿨존이다
상가 옆 쌓인 물건들을 피해
학교로 가는 길은 ‘곡예 수준’
어린이 교통사고 70~80%가
주거지역에서 발생하는데
‘스쿨존 바깥’ 안전은 외면
“은서야, 뒤에! 차 오잖아, 차!”
지난 2일 오전 8시. 책가방을 받아든 은서(8)가 집 앞 골목을 빠져나가 이면도로를 앞질러 가자 어머니 조명희씨(43)가 황급히 딸의 이름을 불렀다. 언덕길에서 내려오던 중형 승합차와 어린이용 노란 버스, 검은색 승용차가 은서가 선 곳을 빠르게 지나쳤다. 조씨는 은서의 손을 잡고 오른쪽 길가로 바짝 붙어서 걸었다. 조씨는 학교를 오가는 길이 늘 아슬아슬하다고 했다.
은서는 서울 양천구 목동 양화초등학교 2학년이다. 집에서 학교까지 15분 거리다. 등굣길 중간 지점인 목동중앙본로 사거리를 지나면 스쿨존(어린이보호구역)이 시작된다. 차량은 단속 카메라를 의식해 스쿨존에선 대체로 서행한다. 스쿨존 앞 교차로에선 녹색어머니회 회원들이 수신호를 보내며 차량을 통제했다.
은서는 700m 가까운 거리를 걸어서 학교에 간다. 절반가량은 스쿨존에 포함되지 않는 길이다. 이면도로에서는 스쿨존 지정 여부와 무관하게 차량이 ‘시속 30㎞’를 넘지 않도록 정해져 있다. 그러나 이 일대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는다. 곳곳에 언덕이 많아 내리막길에서는 가속이 붙기 때문이다. 조씨는 “차들이 ‘쌩’ 하고 달려올 때가 많다”면서 “아이 혼자 학교에 보내기는 너무 불안하다”고 말했다.
스쿨존은 학교 가는 길의 일부에 불과하다. 사망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어린이 교통안전 문제가 부각되지만 ‘스쿨존 바깥’의 이야기는 좀처럼 주목받지 못한다.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학교에 갈까. 아이들은 어떤 등굣길을 원할까. 경향신문은 지난 1~2일 서울 양천구 양화초, 노원구 원광초, 경기 부천시 신흥초 등 3곳의 1~3학년 아이들의 등굣길을 함께 걸었다.
등굣길 위험은 ‘집 앞’에서 시작한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민서(9)와 지훈이(9)도 아파트 입구를 나서자마자 2차선 이면도로를 마주한다. 2일 오전, 민서와 지훈이는 잠시 나란히 섰다가도 차가 오면 약속이라도 한 듯 한 줄로 바꿔 섰다. 학교 앞 대로변 안전펜스가 설치된 곳에 이르러서야 마음 놓고 나란히 걸어갔다.
“뛰거나 걷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차도 다니니까 조심해야 해요.” 지훈이가 말했다.
민서와 지훈이는 ‘등교 친구’다. 집에서 학교까지 10분 거리를 늘 같이 간다. 중계동 원광초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아이들끼리 등굣길 짝꿍을 맺어주는 게 문화가 됐다. 안전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군대로 따지면 일종의 ‘전우조’다.
차도 구분 없어 알아서 피해…“보호구역 더 넓게 지정을”
학부모들, 등·하교 안전 걱정
동행하는 ‘등교 친구’ 맺어줘
차량 피할 보행로 설치 요구
주차 공간 부족 이유 무산도
지난해까지 원광초 학교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는 백운희씨는 “저학년 때는 부모들이 (학교 앞) 대로변까지 데려다주고, 아이가 크면 ‘등교 친구’를 만들어주곤 한다”고 했다.
민서와 지훈이가 걷는 한글비석로15길 일부 구간은 원광초 정문에서 반경 300m 이내에 있지만 스쿨존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보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어 ‘알아서’ 차량을 피해야 한다. 개선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일부 주민들은 3~4년 전부터 보도 설치를 요구했으나 다른 주민들이 ‘주차 공간이 부족하다’고 반대해 실행되지 못했다.
원광초 인근은 지난해 12월 스쿨존 사고가 발생한 강남구 청담동 언북초 인근과 ‘판박이’다.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음주운전 사고로 숨진 언북초 후문 인근도 보도와 차도 혼용도로였다. 주민 반대로 보도 설치를 하지 못했다. 백씨는 “큰 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건 슬픈 일”이라고 했다.
‘스쿨존’보다 넓게, ‘홈존’ 어떨까
스웨덴 등 ‘홈존’ 제도 도입
아이들 활동 구역 차량 통제
주거지역 안전 강화책 시급
집 근처에 시장이나 공장이 밀집해 있으면 아이들의 ‘곡예 등교’는 더 심해진다. 부천 신흥초 1학년 원준이(7)는 집에서 시장 입구를 거쳐 학교까지 ‘ㄷ’자 모양으로 걸어가야 한다. 지난 1일 원준이의 등굣길을 동행했다. 주변에 늘어선 야채·과일 가게와 식료품점, 꽃집 등은 영업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물건을 배달하는 1t 트럭이 좁은 골목을 수시로 오갔다.
원준이는 불법 주정차 된 차량과 좁은 골목을 지나는 차량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걷는다. 시장 입구에서 편의점 인근 스쿨존 시작점까지는 100m 조금 넘는 짧은 구간이다. 이날 오전 8시30분, 원준이는 이곳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5번 넘게 구석으로 몸을 숨겨야 했다. 골목길을 달리는 차량이 주차된 차들을 피해 지그재그로 움직이면 아이의 동선도 지그재그로 바뀌었다.
신흥초에서는 학부모들의 노력으로 작게나마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원준이가 이용하는 통학로 반대편 길, 춘의동에서 도당동으로 이어지는 골목은 차량이 사방에서 모여 엉키는 곳이었다. 200명 가까운 주민 서명을 받아 시청과 경찰서 등의 문을 두드린 결과 지금은 70m 정도 되는 길가에 ‘U형 볼라드’(말뚝형 구조물)가 세워져 있고, 초록색으로 보행로가 표시돼 있다. 그러나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길은 여전히 방치돼 있다. 당시 개선 활동을 주도했던 학부모 곽지현씨는 “조금이라도 안전한 통학로가 되어서 다행이지만, 작은 변화에도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스웨덴 등 일부 나라에는 ‘스쿨존’보다 아동 보호 범위를 넓게 지정하는 ‘홈존’ 제도가 있다. 아이들이 활동하는 모든 공간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거나 학교 정문 인근뿐 아니라 아이들이 자주 다니는 구역에서 차량을 통제한다.
임재경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보도와 차도 분리가 안 된 도로는) 차량이 보행자를 추월하지 못하게 하는 ‘보행자 우선도로’로 지정해 외국의 ‘홈존’과 같은 구역을 만들고,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노면 요철 포장을 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는 “어린이 교통사고 중 70~80%는 (스쿨존 포함) 주거지역에서 발생한다”면서 “주거지역 안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강은·전지현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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