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무거움
장현은 | 노동교육팀 기자
“내가 죽으면 알아줄까, 그때는 관심을 가질까….”
지난 4월 초 어느 날 저녁 경기 고양시 홀트아동복지회 한 사업장에서 일어난 직장내 괴롭힘 관련 제보를 받고 인터뷰를 갔다. 센터 원장의 수년간에 걸친 다양한 부당지시와 모욕으로 인해 회사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직원 3명을 만나 그간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고심 끝에 고용노동부에 직장내 괴롭힘 진정을 넣었지만, 아들 결혼식 홍보를 맡기거나 개인적으로 병원을 갈 때 운전을 맡기는 등 일부 사적 업무지시 혐의만 인정됐을 뿐 차별과 비하, 휴가사용 제한 등은 ‘객관적인 근거가 부족하다’며 인정되지 않았다.
용기 내서 문제를 제기했지만 ‘증거가 없다’는 통보를 받은 뒤여서일까, 모두 지친 모습이었다. ‘얼마나 어떻게 힘들었는지’를 묻는 잔인한 질문과 힘없는 목소리의 답변이 이어졌다. “직장이 지옥”이라고 말한 한 피해자는 “내가 죽으면 알아줄까?”라는 생각마저 했다며 눈물을 보였고, 카페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월요일 퇴근 뒤 만남이었기에 그에게는 ‘지옥 같은’ 직장에서의 화, 수, 목, 금이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답답함을 그는 어떻게 버텨낼까.
취재원과의 인터뷰는 기자에게 굉장히 밀도 있는 시간이다. 나는 주중 업무시간에서 고작 한두시간을 빼낸 것에 불과하지만, 인터뷰 상대방은 자기 삶 전체를, 특히 그중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이야기를 꺼낸다. 기자라는 이유로 나는 이들의 가장 중요하고 불행하고 힘든 삶의 부분들에 관해 듣는다. ‘내가 들어도 되나’ 싶은 이야기들도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 그들이 견뎌온 삶의 무게를 생각하는 나의 발걸음도 무거웠다.
“열심히 일한 것뿐인데,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억울합니다.”
건설노동자들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3월 인천 송도의 한 공사현장 출근시간에 만난 건설노동자들은 거의 3시간에 걸쳐 자신들의 삶을 호소했다. 사다리에서 미끄러져 죽을 뻔했던 이야기, 타워가 전도돼 죽은 동료 이야기가 이어졌다. 일반인들은 알기 어려운 공사현장의 여러 관행에 관해서도 설명하며 ‘요즘에는 건설노동자여서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한없이 무겁기만 했던 그들의 이야기는, ‘월례비가 사라졌어도 위험한 업무를 그대로 해야 한다’는 건조한 내용의 기사로 만들어졌다.
이들에 대한 관심은 금세 사그라졌지만, 정부 압박은 이어졌다. 지난 2월 윤석열 대통령이 “‘건폭’(건설현장 폭력) 임기 내 완전 근절”을 언급하며 시작된 ‘건설노조 때리기’에 이들은 지쳐 있었다. 현장 노동자들은 범죄집단인 건폭으로 낙인찍혔고, 지난해 말부터 건설노조를 대상으로 13차례 사무실 압수수색이 이뤄졌다. 950여명이 수사선상에 올라 이들 중 15명이 구속됐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항변이 계속됐지만 제대로 관심을 가져주는 이는 없었다.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 누군가는 죽음으로 자신을 증명했다.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각국의 노동자들이 연대의식을 다지기 위해” 제정됐다는 노동절 아침, 민주노총 강원건설지부 양회동 지대장은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공갈이랍니다. 제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습니다”란 말과 함께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살아서 들어주는 이가 없으니 죽기 직전에야 동료들과의 에스엔에스(SNS)방에 유서 메모를 띄우고, 자신의 차량에 유서 세통을 남겼다. 죽음으로 호소한 그였건만, 우리는 이제라도 들어줄 자세가 돼 있는 걸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한 취재원의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기자는 매번 누군가의 삶의 무거움에 관해 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하지만 이는 곧 ‘잘 들어야만 한다’는 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내가 죽어야 알아줄까”라는 생각이 들 때, “그래도 당신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의 빈소가 차려지는 이날, 다시금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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