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는 나의 힘!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
'젊음의 가면'에 집착한 엘리자베스 1세
세상은 유혹의 기술로 통한다. 현대사회는 정치인, 연예인은 물론 보통 사람들도 자신을 돋보이려고 고군분투하는 홍보의 시대다. 500년 전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도 자기선전의 달인이었다. 여왕은 자신의 초상화들을 통해 정치적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위 초상화는 엘리자베스 1세가 오른손에 무지개를 쥐고 있기 때문에 '무지개 초상화'라고 불린다. 67세 무렵에 그려진 것이지만 실제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작품 속 다양한 상징물은 당대에 예술이 담당했던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무지개 위에는 '태양 없이는 무지개도 없다'라는 라틴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태양은 군주의 상징이므로 엘리자베스 1세를 의미한다. 무지개는 평화와 번영을 상징한다. 즉, 여왕이 통치하는 한 영국은 태평성대를 누릴 것이라는 메시지다. 여왕은 야생화 자수와 진주로 장식된 크림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 진주는 처녀성과 순수성의 상징이었으며, 그리스 신화의 처녀 신이자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와도 관련이 있다. 보석과 고급 직물은 그녀의 부귀함을 보여줌으로써 힘과 위엄을 과시한다. 초상화 속에서 거의 신격화된 여왕의 이미지는 이처럼 신중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1558년,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적 분쟁으로 분열되고, 해외의 적들에게 둘러싸였으며, 국가 재정은 거의 파산 지경인 나라를 이어받았다. 게다가 당시 정치는 남성들의 경기장이었다. 영국 왕권의 정통성은 남성 왕들에 의해 이어져 왔다. 엘리자베스 1세는 순전히 개인적인 카리스마로 국가를 통치해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 내세운 전략이 처녀 여왕, 즉 '버진 퀸(Virgin Queen)'의 이미지다. 버진 퀸은 신화와 관련된 이미지 메이킹으로, 고대 신화의 아르테미스나 아테나,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살아 있는 구현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성처녀, 여신, 성모 등의 이미지를 차용해 이상화된 여성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여성 군주에 대한 경시와 반감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시인, 극작가, 음악가들은 여왕을 '글로리아나' 혹은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에 비유하며 버진 퀸의 숭배를 강화했고, 화가들은 신격화된 초상화를 그렸다. 여왕은 여러 연인을 두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순결한 처녀였고,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라며 신민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메시지를 널리 퍼트렸다. 순수한 처녀이자 강하고 관대한 어머니라는 여왕의 이미지는 초상화뿐만 아니라 목판, 조각, 동전, 메달, 배지 및 브로치에도 등장했다. 엘리자베스는 거의 종교적 아이콘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강력한 왕인 동시에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독특한 페르소나(persona, 가면 인격)를 창조해 새로운 형태의 군주상을 확립했던 것이다.
여왕은 자신의 여성성을 강점으로 이용할 줄 알았고 외모의 힘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외모는 종종 능력, 재능과 함께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녀는 매우 이지적이었고 10여 개의 언어에 능통했을 정도로 총명했다. 또, 전 유럽 왕실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성 중 한 명이었다. 통치 기간 내내 여러 시간 공들인 화장, 화려한 의상과 보석, 풍성한 가발로 치장했고, 왕실의 공식 초상화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고 위엄 있는 이미지로 창조했다.
특히, 여왕은 흰 피부에 집착했다. 더구나 그녀는 29세 때 천연두에 걸려 생긴 흉터를 덮기 위해 납 화장품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여왕은 납과 식초를 섞어 만든 베네치안 세루스(Ventian ceruse, 베네치아 분)를 피부에 발랐고, 중금속인 납 황화물과 섞은 붉은 염료로 입술을 칠했으며, 역시 납 황화물인 검은색 콜(kohl)로 눈 윤곽을 그렸다. 이것들이 매우 유독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여왕은 나이 드는 것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노년이 되어서는 주름진 피부를 감추고 젊어 보이기 위해 더욱 두껍게 화장했다. 평생 피부 위에 가면을 쓰고 실제의 자기 모습을 감춘 여왕은 그림에서도 실제보다 훨씬 더 젊게 그리도록 지시했다. 이상적으로 그리지 않은 초상화들은 압수되어 파괴되었다. 만년에는 자신의 늙은 얼굴이 보기 싫어 방의 거울을 모두 없애기도 했다.
그러나 여왕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깊은 슬픔이 있었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어머니 앤 불린을 처형했을 때 그녀는 겨우 2살 남짓이었다. 모친의 비극적 죽음과 함께 공주에서 사생아의 신분으로 떨어진 그녀는 이복 언니 메리에 의해 런던탑에 갇혀 지내며 감시와 살해 위협까지 받는 등 불안하고 힘겨운 삶을 경험했다. 이런 성장 환경으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했던 여왕은 어머니의 참수에 대해서도 평생 입을 닫았다. 사실, 그녀는 뚜껑을 열면 그 안에 자신과 앤 불린의 미니어처 초상화가 있는 로켓 반지(locket ring)를 늘 끼고 살았다. 이 반지의 존재는 어머니의 폭력적인 죽음에 대한 깊은 슬픔과 상처를 증언한다.
여왕의 진짜 모습은 항상 조심스럽게 꾸며진 공적 자아의 껍데기 뒤에 숨겨져 있었다. 외모뿐 아니라 그녀의 내면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치세 중 수많은 연설을 했고 무수한 시와 편지를 썼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았으며 모두 공식적인 것들에 불과했다. 나르시시스트적인 초상화들은 어쩌면 과도한 자신감이 아니라 뿌리 깊은 불안과 외상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을 때까지 '젊음의 가면'에 그토록 집착한 것은 평생 쓰고 살았던 껍데기 안쪽의 상처를 숨기는 것에 익숙해서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도 버릴 수 없었던 여성으로서의 허영심일까.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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