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뢰칠정(三牢七鼎) 대신 일곱 덩이 주먹밥 선택한 어머니 마음 [고운기의 돋보기 삼국유사]
편집자주
'삼국유사'는 함께 읽어 즐겁고 유익한 우리 민족의 고전이다. 온갖 이야기 속에는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이 원형처럼 담겼다. 이야기 하나하나에 돋보기를 대고 다가가, 1,500여 년 전 조상들의 삶과 우리들의 세계를 함께 살펴본다.
삼국유사에 가득 담긴 효자 설화
의상의 제자 '진정' 이야기도 포함
자식부터 위하는 모든 부모 마음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새삼 부모 자식 사이의 정이 사무치는 계절이다. 그래서 '삼국유사' 속의 효도 이야기와 그것을 굳이 편찬해 넣은 일연 스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여덟 살에 어머니 곁을 떠나 절로 들어갔던 일연이 그예 돌아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손수 봉양한 것은 일흔일곱 살 가을이었다. 어언 어머니 나이 아흔다섯, 그사이 모자는 70년 세월을 따로 보냈던 것이다. 겨울 지나고 어머니가 세상을 뜨니, 함께한 시간은 불과 반년 남짓. 출가자에게 속가의 인연이란 대수롭지 않다 하지만, 모자에게 이런 마지막 시간은 오롯했겠다 싶다. 일연의 비문에 '목암(睦庵)'이라는 자호(自號)가 나온다. 세상 공명을 마다하고 퇴거하여, 짚신 삼아 어머니와 마지막까지 함께한 진존숙(陳尊宿)의 생애를 흠모한 끝에 지은 이름이다. 진존숙은 중국 목주(睦州) 출신의 고승이다. 일연 또한 어머니를 그렇게 각별하게 생각했다.
맞춤하여 '삼국유사'에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절박한 사연이 여럿 실렸다. 그것은 실로 일연 자신이 주인공인 듯 겹쳐지는 데칼코마니 같다. 의상(義湘) 문하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진정(眞定)의 출가 이야기가 특히 그렇다.
집안에 재산이라곤 다리 부러진 솥 하나뿐, 가난한 아들은 부지런히 일해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아들에게는 숙원(宿願)이 있었다. 의상 문하에 들어 출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집을 비운 사이, 스님 한 분이 절에서 쓸 쇠붙이를 구했다. 어머니는 흔쾌히 그 솥을 시주했다. 정작 아들이 돌아온 다음 어머니는 물색없는 짓이었다 싶어 뒤늦게 근심에 휩싸였다. 그러나 아들은 도리어 기뻤다. 어머니의 신심이 깊어 자신의 뜻을 밝혀도 좋겠다 확인한 까닭이다.
아들은 '효도가 끝나고 나면'이라는 조건 아래 출가의 뜻을 비친다. 그래서 이어지는 두 사람 사이의 가슴 저미는 이야기.
성자의 세계여도 출가는 모진 운명이지만, 아들 결심을 들은 어머니는 '효도를 마친 다음'은 너무 늦으니, '내가 죽기 전에 네가 도를 듣고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어서 가라는 어머니의 첫 번째 권유이다. 당연 아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봉양은 그나마 마지막 할 일인데 그만둘 수 없다. 그러자 어머니의 두 번째 권유는 좀 더 단호해진다. 가지 않으면 효도한다고 한들 '나를 지옥 구덩이에 빠뜨리는 일'이며, 봉양한다고 한들 '네가 해주는 삼뢰칠정(三牢七鼎)이 남의 집에서 빌어먹는 음식만 못하다'는 것이다. 삼뢰는 소·양·돼지의 세 가지 고기 요리, 칠정은 일곱 개의 솥에서 끓인 국이다. 한마디로 극한의 진수성찬이다.
도대체 세상의 어머니는 어디에 이런 마음의 근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들의 지극한 효심이 따르지 못할 차원이다. 그래도 머뭇거리는 아들, 이제 어머니의 마지막 권유는 말이 아니었다. 행동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쌀독을 뒤집어 탈탈 털어내 주먹밥 일곱 덩이를 짓고는, 가는 길 밥 지어 먹는 시간도 아깝다며, '내 보는 눈앞에서 그중 하나 먹고, 나머지 여섯 개를 싸서 서둘러 가라'고 재촉하였다. 독에 쌀을 채워 놓고 떠나도 모자랄 판이다. 어머니는 그조차 막았고, 다름 아닌 그것이 효도라고 일렀다. 아, 그것이 효도란다.
어머니가 만든 주먹밥을 둘러메고 떠나는 아들의 밤길이 깊기는 얼마나 깊었을까. 이 아들이 바로 진정이다. 70년 만에 돌아와 어머니를 모신 일연의 겨울밤 또한 길었으리라.
다만 수행자와 어머니의 이야기에 놀라고만 있을 수 없다. 어느 자식의 어머니인들 어머니이기는 다를 바 없어, 우리도 근력 깊은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으니, 나는 지금 밤길의 어디쯤 가고 있는지 한번 헤아릴 일이다. 세상을 사는 것이 수행 아닌 바 아니지 않은가.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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