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과 옛 신문광고] 첫 국산 튜브형 럭키치약

손성진 2023. 5. 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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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일본 생활화학 기업 '라이온'이 '라이온 치마'라는 치약을 국내에 들여와 광고를 하며 판매했다.

광복 후 라이온 치마마저 판매망이 끊기고 서민들은 대부분 소금으로 치약을 대신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락희화학공업사를 경영하던 LG그룹 창업주 구인회가 치약 개발에 나섰다.

외제보다 값이 3분의 1이나 싸고 품질이 비슷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럭키치약은 출시 3년 만에 판매 1위에 오르며 치약 대중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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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일본 생활화학 기업 '라이온'이 '라이온 치마'라는 치약을 국내에 들여와 광고를 하며 판매했다. '치마(齒磨)'란 이를 갈아내는 분말이라는 뜻이다. 서민들에겐 칫솔도 구경하기 어려운 시절이라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요즘 쓰는 튜브 형태의 액상 치약은 미국 콜게이트사가 1896년 무렵 선보였다. 광복 후 라이온 치마마저 판매망이 끊기고 서민들은 대부분 소금으로 치약을 대신하고 있었다. 극히 일부 계층에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값비싼 콜게이트 치약을 쓰는 형편이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락희화학공업사를 경영하던 LG그룹 창업주 구인회가 치약 개발에 나섰다. 락희화학공업사는 LG그룹의 모태기업이다. 1947년 구인회는 부산 서대신동에 작은 공장을 세우고 '럭키크림(LUCKY CREAM)'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크림을 행상들이 북을 동동 치며 팔고 다닌 데서 '동동구리무'라는 이름이 나왔다. 당시 미국의 인기 여배우 디아나 다빈 사진을 통에 붙여 외국 화장품 모양을 낸 럭키크림은 불티나게 팔렸다. 공장이 부산에 있어 전쟁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 생산과 판매는 순조로웠다.

락희화학은 국내 최초로 플라스틱을 생산한 기업이기도 하다. 럭키크림 뚜껑이 잘 깨져 반품이 잦았는데 안 깨지는 용기를 찾다 플라스틱을 생산하게 된 것이다. 동동구리무로 번 돈 3억원으로 전쟁 중이던 1951년 11월 부전동으로 공장을 이전해 국내 플라스틱 시대를 열었다. 락희화학의 첫 플라스틱 제품은 칫솔과 빗이었다. 그런데 치약이 귀하니 칫솔이 팔리지 않았다. 치약을 만들어야 했다. 구인회는 외제 치약 성분을 분석하고 품질이 뒤지지 않는 치약을 만들고자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우리의 목표는 콜게이트"라고 했다. 드디어 1955년 가을 튜브 치약 생산에 성공해 신문에 광고를 냈다(사진·동아일보 1955년 6월 10일자).

"미국 원료, 미국 처방, 독일 기계로 된 제품이므로 품질이 미제와 꼭 같습니다. 향과 맛이 참 좋습니다. 오래 두어도 마르지 않고 얼지 않습니다"라고 광고했다. 만일 사용 중에 마르거나 변질하는 경우에는 돈을 돌려주겠다고도 했다. 그래도 소비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임직원들은 치약 모형을 트럭에 부착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선전하고 치약을 나눠 주었다. 외제보다 값이 3분의 1이나 싸고 품질이 비슷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럭키치약은 출시 3년 만에 판매 1위에 오르며 치약 대중화를 이끌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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