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희 칼럼]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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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방미성과에 대한 자찬이야 뭐랄 건 없다.
한미동맹 70주년에 건 이번 방미의 가장 절박한 현안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북핵문제였다.
협량한 일본 정서와 극우여론으로 보아 이번 방한에서 특별한 성과를 기대하긴 어려워도 시간은 지날수록 우리 편이다.
약소국의 운명으로 살아온 우리로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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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대중 대일 관계에서 전환적 변화 시도
한국의 위상 걸맞은 새로운 외교 패러다임
정교한 위험요소 예측·관리 능력 수반해야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성과에 대한 자찬이야 뭐랄 건 없다. 주목하는 건 야당을 비롯한 비판자들의 평가다. 성과 없는 깡통외교, 굴종외교, 호구외교…. 이 정도면 일찍이 없던 외교참사다. 과연 그런가.
어지러운 논란에 정작 본질은 흐려져 있다. 한미동맹 70주년에 건 이번 방미의 가장 절박한 현안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북핵문제였다. 처음부터 목표는 미국의 획기적 확장억제를 통해 우리의 안전과 번영을 지키는 데 있었다. 워싱턴선언은 그래서 한미연합방위체제와 확장억제의 실효성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일관돼 있다.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고 핵을 한국에 선제적으로 쓸 의사를 공언한 게 2년 전이다. 실제로 이후 소형전술핵과 근거리 투발수단들이 연달아 공개됐다. ICBM으로 미국의 대응을 제약하고 유사시 일거에 남조선의 전쟁의지를 제거해 상황을 속결하겠다는 게 그들의 호언이다. 미중 충돌이 격화하는 주변정세도 북한을 고무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자, 이 상황에서 다른 어떤 안전보장책이 있을 수 있나.
바이든 대통령이 “북한정권의 종말”을 언급하고 가장 치명적인 전략핵잠과 폭격기 투입을 거론했음에도 북한의 반응은 전 같지 않다. “삶은 소대가리” 같은 막말 대신 현실 억제력에 기반한 대북정책 변화에 당혹해하는 분위기가 읽힌다. 워싱턴선언이 당장은 성에 안 차도 분명한 전진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마저 인색할 건 아니다.
차제에 더 큰 시각으로 봐야 할 건 우리 외교의 전면적 전환이다. “무력에 의한 현상변경 반대”라는 원론에 “말참견”으로 망발한 중국에 “국격을 의심케 하는 심각한 결례”로 맞받고 주한대사를 초치한 것도 전에 없던 대응이다. ‘큰 산 중국 변방의 작은 봉우리’로 굴욕을 자초해온 과거를 벗어나 한중을 정상적 국가관계로 바꾸겠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중국은 북핵 제어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기대할 게 없어 보인다. 가장 큰 교역국이라는 데 발목을 잡혀왔지만 사실은 그것도 일방 시혜가 아닌, 상호 국익 추구에 따른 결과다. 중국의 굴기로 어차피 양국 경제관계도 빠르게 재편될 수밖에 없다.
지난 칼럼에서 대일외교에 대해서도 시대적 전환의 의미를 갖는다고 썼다. 근세 이후 매양 당하고 매달리던 약자 입장에서 처음으로 양국관계의 이니셔티브를 쥔 사건으로 볼 수 있다는 취지였다. 결국 뜻밖의 부채를 떠안고 당황한 쪽은 일본이라고 했다. 기시다 총리의 조기 방한을 견인한 것도 이 연장선이다. 협량한 일본 정서와 극우여론으로 보아 이번 방한에서 특별한 성과를 기대하긴 어려워도 시간은 지날수록 우리 편이다. 양국관계는 분명 대등한 입장에서 사안을 다루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한국은 국제무대의 주빈으로 고정석을 얻었다”는 미 외교전문가의 표현은 대단히 시의적이다. 말할 것도 없이 바탕은 한국의 달라진 힘과 국가위상이다. 이번에 미국의 이례적 환대도 이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곧 G7을 시작으로 NATO, G20, APEC 등 우리의 실력과 영향력을 확인받고 그에 걸맞은 책임을 보여야 할 대형 외교이벤트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잘하면 머지않아 G8, G10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약소국의 운명으로 살아온 우리로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다. 다만 외교적 대전환에 수반할 여러 위험에 대해선 용의주도한 컨틴전시 플랜을 당부한다.
윤 정부가 국내문제를 다루는 방식에는 비판적이나 대북정책과 외교의 큰 방향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적어도 이에 관한 한 국내정치를 대하듯 하는 관성적 비난들은 그래서 썩 합당치 않아 보인다.
이준희 고문 jun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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