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한 번도 어려운데 2번, 3번이나? 2회 이상 MVP 차지한 KBL 스타들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5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상민_KBL 최초의 왕조를 이끌다
1997-1998시즌은 지금의 라운드 체제를 갖춘 최초의 시즌이었다. 팀당 45경기로 치러졌고 대전 현대는 31승 14패로 최고 승률(68.9%)을 기록했다. 불과 한 시즌 전, 그러니까 프로 출범 원년이었던 1997년에 플레이오프조차 오르지 못했던 현대가 급변할 수 있었던 건 강력한 핵심이 구축된 덕분이었다. 이상민과 추승균이 합류해 ‘이-조-추’ 트리오가 완성됐고 외국선수 조니 맥도웰이 기대 이상의 폭발력을 보이며 리그를 휩쓸었다. 이상민은 맥도웰을 춤추게 한 남자였다. 정확하고도 절묘한 패스가 바탕이 된 콤비 플레이로 상대팀을 골치 아프게 했다. 리바운드(5.0개)는 이상민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였다. 리바운드 직후 직접 속공을 지휘하며 구석구석에 찔러줬다.
스타성까지 엄청났다. IMF로 관중 동원에 흥행이 시원찮았던 프로농구 경기장의 데시벨을 높이는 역할을 도맡았다. 만일 그 시절에 지금 같이 소셜미디어가 있었다면, 웜업 장면부터 어시스트까지 수많은 ‘짤’을 양산했을 것이다. 이러한 개인 퍼포먼스 + 팀 성적이 결합된 덕분에 이상민은 시상식에서 만장일치(37표 중 37표)로 MVP가 됐다. 유효 투표수가 지금에 비하면 많이 적지만(2022-2023시즌은 총 109표), 당시에도 쟁쟁한 스타들이 많았기에 KBL 역사상 유일한 만장일치라는 점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현대는 그 뒤로도 2시즌 더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다. 1998-1999시즌은 전 시즌보다도 훨씬 압도적이었는데, 33승 12패(73.3%)를 기록하며 다시 한 번 선두에 올라섰다. 맥도웰과 재키 존스 콤비도 위력적이었다. 정통 빅맨이 아니었기에 로우포스트 자체는 약해졌다는 평가였지만, 존스의 베이스볼 패스는 현대 속공에 재미를 더해준 또 다른 요소였다.
플로어리더 이상민은 7.9개의 어시스트로 리그 선두를 달렸다. 14.4점은 커리어하이였다. 시상식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2시즌 연속 현대를 바싹 쫓은 기아의 강동희였으나, 투표에서는 큰 차이(56-8)로 따돌리며 두 시즌 연속 MVP가 됐다. 보통 2시즌 연속 MVP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팀 성적은 물론이고, 개인 퍼포먼스 역시 더 까다로운 기준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이상민의 경우 기록과 활약 모두 정상급이었다. 한편 그 시즌 현대는 추승균(수비), 맥도웰(외국선수), 신선우 감독(감독상) 등도 상을 휩쓸었고, 조성원은 챔피언결정전 MVP가 됐다. '4쿼터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굳힌 시기였다.
‘크리스마스 빅딜’은 1999-2000시즌을 바꿔놓은 요소였다. 서장훈의 파트너로 조상현이 가세하면서 SK 포지션별 전력은 더 탄탄해졌다. 로데릭 하니발은 매치업 악몽을 선사했고, 황성인과 조상현의 에너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런 선수 구성이 가능했던 건 빅맨 서장훈 덕분이었다. 서장훈은 데뷔 후 7시즌 연속 20+점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였다. 득점-리바운드로 평균 20점-10리바운드 시즌을 보낸 것도 무려 4번이었다. 1999-2000시즌도 그 중 하나였다. 24.2점은 외국선수들을 포함해도 전체 2위(1위 에릭 이버츠, 27.7점)였고, 리바운드(10.0개) 역시 국내 리바운더 중에서는 독보적 선두였다. 더블더블은 25번으로 전체 7위였는데, 라건아를 제외하면 ‘한 시즌 더블더블 20회’를 2시즌 이상 기록한 국내선수는 서장훈 외에 없었다. 비록 SK는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진 못했지만, 시즌 내내 정규리그 챔피언 현대를 위협했다. 시즌이 끝났을 때 두 팀의 승차는 겨우 1경기 차였다. 프로 출범 후 첫 3년간 MVP는 정규리그 1위 팀의 스타에게 돌아갔지만, 이때 처음으로 2위 팀 스타에게 주어졌다. 서장훈은 총 67표 중 60표(89.6%)를 차지하며 프로 커리어 첫 MVP를 차지했다.
그 뒤 다시 그가 시상식의 대미를 장식한 건 6년이 지난 2006년이었다. 2005-2006시즌 시상식에서는 최초로 공동 MVP가 나왔다. 정규리그 1위 팀 현대모비스의 양동근과 2위 팀 삼성의 서장훈이었다. 2005-2006시즌 삼성은 32승 22패로 동부를 1경기 차로 따돌리고 2위를 차지했다. 서장훈이 삼성에 합류한 이래 가장 좋은 성적이자 유일한 4강 직행이었다. 이 시즌 삼성은 KBL 트랜드를 앞서간 농구를 펼쳤다. ‘2대2 마스터’ 강혁과 올루미데 오예데지의 콤비 플레이에 네이트 존슨의 화력, 그리고 슈터로 자리매김한 이규섭 등 높이와 화력을 두루 갖춘 팀이었다. 이런 색을 갖추는데 있어 서장훈의 역할도 컸다. 사실, 2005-2006시즌은 서장훈의 ‘게임 지배력’만 본다면 데뷔 이래 가장 저조한 시즌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평균 20점 달성에 실패한 시즌이기도 했고, 리바운드도 5.8개에 그쳤다.
그래도 서장훈이 여전히 무서운 선수라는 건 부정하기 힘들었는데, 장점인 3점슛을 극대화한 덕분이었다. 207cm의 그가 평균 1.4개의 3점슛을 성공(38.5%)시키니 상대 입장에서도 막기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시기 서장훈의 3점슛이 환영만 받았던 건 아니었다. 이중잣대 탓이었다. 2000년대 중반은 국내 농구단 실무진이나 농구인들이 유럽 프로농구를 막 접하던 시점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210cm의 장신이 3점슛을 던지는 전술을 신기해하고 엄지를 치켜들면서도 정작 서장훈의 3점슛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센터가 그러면 안 된다’는 고전적인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그러나 삼성 입장에서는 언제든 림 공략이 가능한 존슨, 더블더블 머신 오예데지도 있었다. 서장훈과 이규섭이 넓게 포진함으로써 공간을 활용할 수 있었다. 기록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서장훈은 여전히 국내선수 득점 1위, 리바운드 2위에 올랐다. 리그 2위 팀임에도 공동 MVP로 인정을 받은 배경이었다. 당시 서장훈의 표정은 다소 복잡해 보였다. “(양)동근이 혼자 받아야 될 상을 같이 받아 미안하고 폐를 끼친 것 같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면서도 “매년 후보에만 올랐다가 안 됐기에 기대를 안 했다. 영광스럽고 노력했던 모습들을 평가해준 것 같아 기쁘다”고 기쁨도 감추지 않았다.
원주 TG삼보부터 시작해 DB에 이르기까지, 김주성의 팀은 늘 ‘수비’로 상대를 압도해왔다. 상대방을 꽁꽁 묶어놨던 드롭 존이 대표적인 무기였고, 그 중심에는 기동력을 갖춘 김주성의 존재감이 절대적이었다. 데뷔시즌부터 평균 2개 이상의 블록슛을 기록했는데, 블록슛을 몇 개 했느냐를 떠나 ‘파트너’ 자밀 왓킨스와 함께 높이와 기민함으로 상대 동선을 틀어막던 그 존재 자체가 상대를 답답하게 했다. 당시 이들을 상대했던 한 가드는 "앞은 물론이고 좌, 우도 공간이 안 보이더라"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TG삼보는 KBL 사상 최초로 70점대 실점을 기록(2003-2004시즌, 78.6점)했고, 2011-2012시즌에는 60점대 실점을 달성(?)하기도 했다. KBL 역대 한 경기 최소 득점 경기는 KGC가 기록한 41점인데, 2012년 1월 11일 원주에서 달성됐다.
이처럼 김주성 데뷔 후 KBL 수비의 역사는 새로 작성되어 왔고, 그 전설의 시작이 2003-2004시즌이었다. TG삼보는 40승 14패를 기록하며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고 김주성은 MVP가 됐다. 득표율은 무려 97.4%로, 78표 중 76표가 김주성을 향했다. 당시 기준 1997-1998시즌 이상민(만장일치)에 이어 역대 2위로 지금도 이보다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선수는 안 나오고 있다. 2021-2022시즌 최준용(SK)의 95.4%가 제일 근소한 기록이다. 18.4점 8.9리바운드 2.4블록슛은 모두 커리어하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때 유일하게 오점으로 남은 것이 있다. 바로 통합우승이다. TG삼보는 찰스 민렌드의 KCC를 만나 3승 4패로 패배, 통합우승 기회를 놓쳤다. 그 아쉬움을 털어낸 시즌이 바로 2007-2008시즌이다. 동부는 38승 16패(승률 70.4%)를 기록하며 여유있게 정상에 올라섰다. 김주성이 MVP 시즌 이후 오랜만에 블록슛 1위(2.2개)에 복귀한 시즌으로, 이 시즌 김주성은 정규리그-올스타-챔피언결정전까지 모두 MVP를 휩쓰는 트리플 크라운 시즌을 보냈다. 역시 이견이 없었다. 전체 75표 중 70표가 그에게 돌아간 것으로도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다.
한편, 2007-2008시즌은 김주성과 원주 프랜차이즈가 마지막으로 챔피언을 거머쥔 시즌이었다. 이후 동부는 2011년, 2012년, 2015년, 2018년에도 챔피언결정전에 올랐지만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했다. 김주성은 44승이나 거두며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던 2011-2012시즌에도 MVP 후보에 올랐으나, 이때는 같은 팀 후배 윤호영에 타이틀이 돌아갔다.
양동근은 김주성처럼 ‘신인상→ MVP’ 코스를 밟은 선수다. 2004-2005시즌 데뷔해 1년 뒤 서장훈과 공동 MVP가 됐다. 이때 투표에서는 정확히 30표씩이 나왔는데, 현대모비스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둔 건 맞지만, 아직 2년 차인 양동근의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었다. 다만, 1년 뒤인 2006-2007시즌에는 더 이상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현대모비스의 통합우승을 주도한 양동근은 15.7점 5.9어시스트 3.6리바운드 1.9스틸로 코트를 휘저었다. 득점과 함께 경기당 성공시킨 자유투(2.6개)는 커리어하이 기록이었다. 공, 수에서 지칠 줄 모르고 엄청난 에너지를 뿜었다.
이런 활약은 기존 농구대잔치 세대 가드들과의 세대교체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상민, 신기성 등 많은 가드들이 양동근의 힘과 스피드를 앞세운 플레이에 고전했다. “나는 선배들에게 져도 잃을 게 없는 선수”라며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막상 코트에서는 매서운 눈빛으로 선배만 응시하며 쫓아다니고, 돌파와 포스트업 등으로 진땀빼게 했다. 결국 2년 연속 현대모비스를 1위에 올려놓은 그는 이상민에 이어 역대 2번째 ‘2년 연속’ MVP가 될 수 있었다. 2006-2007시즌의 경우, 유효표 78표 중 70표가 양동근을 향했다(2위 주희정/5표).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해봤다. 만일 양동근이 군 입대를 하지 않았다면? 현대모비스의 강세는 좀 더 이어지지 않았을까? 양동근도 3년 연속 정규리그 MVP에 도전해보지 않았을까? 사실 이는 장담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다. 2006-2007시즌 직후 외국선수 트라이아웃 제도가 부활한 탓에 크리스 윌리엄스도 떠나야 했으니 말이다.
양동근이 다시 무대의 중앙에 선 것은 8년이 지난 2014-2015시즌이었다. 이 시기는 ‘유재학과 현대모비스의 시대’였다. 3시즌 연속 패권을 차지했다. 다만 MVP의 영예가 돌아온 건 ‘THREE-PEAT’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4-2015시즌이었다. 2012-2013시즌에는 SK의 1위를 이끈 김선형이, 2013-2014시즌에는 LG의 정규리그 우승을 주도한 문태종이 가져갔다. 두 시즌만 해도 양동근은 MVP 후보로 거론되지 못했는데, 현대모비스 승리 행진에 가세한 문태영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2014-2015시즌은 달랐다. 현대모비스가 39승 15패로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면서 MVP는 '집안싸움'이 됐다. 라건아(당시는 리카르도 라틀리프)와 양동근이 후보가 된 것이다. 그러다 KBL이 외국선수 MVP를 부활시키면서 라틀리프가 자동 제외됐고, 양동근은 2위 팀 김주성과 경합 끝에 KBL 통산 최다이자 개인 3번째 MVP를 품었다. 11월, 12월, 2월에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2014-2015시즌에만 3번이나 ‘이달의 선수’ 상을 수상할 정도로 꾸준했다.
앞서 언급했듯, 2년 연속 MVP가 되기 위해서는 전 시즌보다 확실히 나아진 무언가를 보여야 한다. 2015-2016시즌 양동근이 그랬다. 현대모비스는 시즌 마지막 날까지 치열하게 달린 끝에 36승 18패로 정규리그 최고 승률을 기록했다. 다만 KCC와의 상대전적에서 2승 4패로 밀리면서 정규리그 우승은 놓쳤다. 비록 최종 순위는 2위였지만 양동근이 MVP 후보로 오른 이유는 확실했다. 우선, 3연패를 함께 한 문태영과 라건아가 떠나면서 객관적 전력이 약화 됐다. 외국선수 전력도 아이라 클라크와 커스버트 빅터로, 라건아가 지키던 시절에 비하면 무게감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 정규리그 최고 승률을 기록한 것은 양동근의 활약 덕분이었다. 양동근은 어시스트 1위에 오르는 등 전 시즌보다도 나아진 활약을 펼쳤다. 다만 MVP 투표는 2005-2006시즌만큼이나 치열했는데, 겨우 득표율이 49.5%였다. 단 한 표 차이로 MVP 경합 상대였던 전태풍을 제치고 MVP가 된 것이다. 당시 “이게 맞나 싶어 검산을 여러 번 했다”던 KBL 직원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제 현역 중 MVP 2회 수상 기록을 가진 선수는 김선형뿐이다. 당분간 양동근의 아성을 뛰어넘을 선수는 나오기 힘들 것이다. 그 아성을 어떻게 쌓아 올렸는지 생각해야 한다. 투표권을 가진 미디어는 더 높은 기준을 요구했고, 양동근은 더 안 좋은 상황에서도 리더와 에이스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그 기준을 충족시켰다.
양동근은 2007년 수상 후 2015년까지 8시즌을 기다렸다. 올 시즌 김선형은 그보다 긴 10년 만에 다시 MVP가 됐다. 2012-2013시즌 이후 첫 수상. 2012-2013시즌 김선형은 프로농구 스타 계보를 이을 차세대 기대주였다. 클러치 타임을 즐기는 해결사이자, 다이내믹한 쇼타임을 선사하는 퍼포머였다. 애런 헤인즈와 함께 SK를 정규리그 우승에 올려놓으며 이견의 여지가 없는 MVP가 됐다.
그 뒤 김선형의 나날은 팀과 함께 롤러코스터를 탔는데, 무엇보다도 2017-2018시즌에 그에게 닥친 불운한 부상이 치명적이었다. 개막 2경기 만에 오른쪽 발목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입으며 수술에 들어간 것이다. 다행히 3월에 복귀해 챔피언결정전 우승까지 돕긴 했지만 스스로 느끼는 퍼포먼스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김선형은 피나는 노력 끝에 운동능력을 회복하고, 기술을 연마하며 기량을 회복해갔다. 2019년 1월 KT전에서의 49점은 그 시작점과도 같았다.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중단되었던 2020년 오프시즌, 필자를 만난 김선형은 “이제 덩크슛도 부담없다”며 ‘펄펄 날던’ 그 시절의 컨디션을 회복해가고 있음에 뿌듯해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2022-2023시즌의 그를 보면 ‘회복’이 아니라 오히려 20대 시절보다도 훨씬 더 나은 기량을 보이는 것 같다. 유로스텝, 플로터, 스쿱샷, 3점슛 등 다양한 방식으로 상대를 곤란에 빠트리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전 시즌 우승주역이었던 안영준이 군입대를 하고, MVP 최준용마저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한 상황에서도 SK를 마지막 19경기에서 17승 2패로 이끌었다. 2월 1일 이후 그가 올린 득점은 18.4점으로 국내 선수 2위였고(1위 이대성, 18.5점), 어시스트는 8.1개로 압도적 1위였다. 35살의 나이에 평균 34분 이상을 소화했다. 양홍석, 이정현, 하윤기, 변준형 같은 20대 선수들보다도 평균 2~3분이 많다.
이러한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소속팀 SK가 4강에 직행하지 못했음에도 불구, 그를 시즌 MVP에 올려놨다. 김선형은 이 MVP 트로피에 “희노애락이 묻어있는 무거운 의미의 MVP인 것 같다. 그래서 더 뭉클했다”라고 고백했다. 언젠가 조성민은 MVP에 대해 ‘인생에 언제 다시 찾아올 지 모르는 소중한 기회’라고 말한 바 있다. 급변하는 리그 환경 속에서 팀 성적과 퍼포먼스를 유지하고, 미디어와 팬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는 등 여러가지가 맞아 떨어져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꾸준한 자기 관리와 더 나아지겠다는 멘탈과 프라이드로 수차례 단상에 섰던 이상민, 서장훈, 김주성, 양동근, 김선형의 사례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사진_점프볼DB(문복주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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