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에선 보드, 3층은 그물침대…아이들이 설계하면 달라요 [ESC]
광장처럼 넓은 실내의 한쪽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쭉 뻗은 투명한 창이다. 창에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블라인드처럼 내려온 스크린에는 자세가 다른 그림 2개가 담겼다. “어떻게 보이나요?” 요가 강사의 질문에 장현초등학교 4학년 40여명이 서로 답하겠다고 손을 든다. “왼쪽 사람 목이 삐뚤어졌어요.” “어깨가 삐뚤삐뚤해요.” 아이들은 자신 있게 답했다.
지난달 26일 찾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로의 청소년 복합문화공간 ‘펀그라운드 진접’(연면적 3122㎡,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에서는 초등학생 대상 ‘자존감 높이기’와 요가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다 재밌어요. 시간이 금방 지나갔어요. 15번도 넘게 왔는데, 3층에서 쉬는 게 정말 좋아요.” 수업에 참여한 신용주군이 웃으면서 말했다.
수업 내용만 보면 여느 청소년 수련관과 다를 게 없지만, 이곳은 다른 시설과는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 이곳을 이용하는 아이들의 만족도가 높은 이유다. 수업이 진행되는 1층은 광장처럼 넓은데다 2층이 1층 면적의 절반만 차지해 1층의 층고가 높다. 넓은 공터 같은 이곳에서 아이들은 스케이트보드도 맘껏 탈 수 있다. 시선은 막힘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영화관이나 공연장 좌석이 되기도 한다. 어디에도 고정되고 규정된 공간은 없다. 그 흔한 강의실, 독서실, 어학실도 없다.
“학교 하나 더 만들 필요 없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3층이다. 크기와 모양이 다른 원통형 아지트가 20개 있어, 외계 행성에 온 것처럼 신기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선인장 정원 위에 설치된 그물침대에도 누울 수 있다. 바닥재가 친환경 소재로 만든 폭신한 감촉이어서 어디든 앉는 곳이 ‘내 자리’가 된다. 1주일에 두세번 이곳을 찾는다는 이하연(장현초교 4학년)양은 “친구들과 원통 안에 들어가 보드게임도 하고 얘기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김효진 펀그라운드 진접 센터장(청소년지도사)은 “방과 후 카페나 피시방, 편의점으로 향했던 아이들이 이젠 이곳에 온다”고 했다.
아이들 마음대로 배열할 수 있는 소파,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다양한 예술 서적들, 자전거와 킥보드 거치대와 보드게임 100여종, 3시간 대여가 되는 태블릿피시, 인쇄가 가능한 다용도실, 플리마켓 판매대 등 공간을 채운 구성물조차 아이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이 공간의 쓰임을 정한 이들은 어른인 우리가 아니라 아이들이에요. ‘여기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여기에서 너희들이 뭘 할지는 너희가 정하는 거다’, ‘이 공간을 만들 사람은 너희들이다’란 얘기를 처음부터 해왔고, 설계 단계부터 아이들의 참여가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그런 의견이 반영된 결과물이죠.” 김 센터장의 말이다. 이 공간의 주인이 어린이·청소년이어야 함을 2019년 건축 기획 단계부터 명확하게 규정한 것이다. 이곳을 설계한 신호섭·신경미 신아키텍츠 공동대표 건축가들의 철학과도 일치했다. “이미 학교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 학교 하나를 더 만들어 줄 필요는 없다”(신경미)는 생각에 건축가들은 설계 단계부터 어린이·청소년들을 참여시키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건축물의 발주처인 남양주시도 제안 공모 과정에서 건축가들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청소년 디자인 워크숍’이 꾸려졌고, 남양주에 사는 20여명의 청소년 대표들은 건축가, 남양주시 공무원, 청소년지도사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설계에 참여했다. 청소년 대표 중 한명이었던 이라엘(광릉중학교 2학년)양은 지난 1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저희가 사용할 공간이니까 우리 눈높이에 맞게 꾸며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고 공간이 만들어져서 좋았다”며 “우리 의견 대부분이 반영된 공간”이라고 했다.
자전거·킥보드 거치대가 실내에 있는 이유
김 센터장은 “처음 아이들에게 층마다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창의력이 발휘된 그 상상이 설계의 바탕이 됐다. 실내에 자전거 거치대를 둔 것도 아이들의 생각이다. ‘우리의 이동수단은 자전거나 킥보드인데, 항상 밖에 방치돼 있다. 눈비 다 맞는다. 안에서 잘 보관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3층도 ‘큰 방은 싫고 작은 방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반영된 것”이라고 했다.
청소년들의 의견은 설계 단계에 그치지 않고 운영 과정에도 반영되고 있다. 남양주도시공사가 위탁 운영을 맡고 있지만 학생자치기구인 청소년문화기획단이 꾸려져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다. 기획단 소속 김현진(광동중학교 3학년)군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우리가 기획하고 진행하는 게 많다. 학교 동아리와는 다르다. 의견도 많이 낸다. 여기는 우리가 주인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기획단 소속 청소년은 대략 20명이다. 김 센터장은 “어린이·청소년이면 누구든 의견을 낼 수 있다. 프로그램 제안도 받는다. 피드백을 주고 그 내용을 청소년지도사들과 공유한다”고 말했다.
지역의 대표적인 청소년 시설이 태어나기까지 우여곡절도 있었다. 청소년 시설은 반경 50m 안에 술집 등 청소년 출입금지 업소가 있으면 설립이 불가능하다. 청소년 시설들이 주로 인적 드문 산골에 세워지는 이유다. 펀그라운드 진접 부지 50m 안에도 술집이 있었다. 김 센터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점이 있어서 큰 장벽이었죠.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진 거예요. 주점은 폐업했고, 건물주도 우리의 이런 취지에 공감해 유사시설을 들이지 않았어요. 지역민들의 배려도 완공에 한몫한 셈이죠.”
지난해 6월 문 연 이곳은 지난해만 하루 평균 230여명, 모두 1500여명의 청소년이 다녀갔다. 청소년 공간의 성공 여부가 이들의 주도적인 참여에 있음을 펀그라운드 진접은 증명했다. 입구엔 ‘청소년만 입장 가능’이라는 안내가 있다. 전국 청소년이면 누구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아이들은 애정을 듬뿍 담아 이곳을 ‘펀그’라고 줄여 부른다. 오늘도 아이들은 친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한다. “우리 ‘펀그’ 가서 쉴까.”
‘펀그’ 설계 건축가, 어른 욕심이 만든 획일적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어”
청소년 문화공간 ‘펀그라운드 진접’의 설계자는 신호섭(49)·신경미(41) 신아키텍츠 공동 대표 건축가들이다. 펀그라운드 진접엔 이들이 10년 넘게 사회문화적 가치를 알리려고 노력한 공공건축 철학이 녹아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있는 신아키텍츠 사무실에서 이들을 만났다.
“공공건축이 왜 중요하냐면, 예를 들어 근사한 서재 하나 없는 좁은 방에 사는 청년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인근에 공공도서관이 있다면, 그는 충분히 그 결핍을 해소할 수 있죠. 세금 낸 우리가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게 공공건축입니다. 문화적 인프라죠. 항만·도로만 인프라가 아닙니다.” 신호섭씨의 말이다. 신경미씨도 “좋은 건물 하나 만들어지면 사람들이 유입되잖아요. 그게 상업시설이 아니라 공공건축이 해야 하는 일이죠. 멋진 카페가 생겨서 사람들이 모이는 것보다 근사한 도서관이 생겨서 사람들이 모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공공건축 설계에서 ‘공간에서의 관계’에 중점을 둔다고 했다. 펀그라운드 진접에도 이 점이 투영됐다. “높은 단상의 교탁 앞 선생님과 그 아래에 있는 아이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동그랗게 앉으면 형성되는 그런 관계 말입니다”(경미씨)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의) 관계를 경험하면 그게 또 새로운 경험으로 축적됩니다.”(호섭씨) 이들이 펀그라운드 진접을 설계한 목적은 건축 잡지 <공간>(SPACE) 인터뷰에서 밝힌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어른들의 무관심, 편견, 욕심이 만들어낸 천편일률적인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들은 부부다. 14살 때부터 프랑스에서 산 경미씨와 고려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 간 호섭씨가 마른라발레 건축학교 석사 과정에서 만나 건축철학을 매개로 사랑을 키웠다. 2009년 귀국한 이들은 그 이듬해 신아키텍츠를 설립한다.
서울시교육청의 ‘꿈을 담은 교실’(꿈담) 사업, 까망돌도서관, 청소년 누리터 위드 등 줄곧 이들은 초등학교 교실, 동사무소, 어린이 도서관, 청소년 시설, 놀이터, 어린이집 등 공공건축 설계에 매달렸다. 이들의 손이 닿은 서울 문성초교(2017), 신양초교(2019), 의정부 신동초교(2020)의 저학년 교실들은 놀이형 교육 공간으로 변신했다. “낙서 공간이 생기고, 아이들이 교실을 주체적으로 다양하게 쓸 수 있게 되자 선생님과 아이들 관계가 달라졌어요.”(경미씨)
이들이 만든 공간들엔 공통점이 있다. 풍성한 빛과, 안팎의 경계가 흐릿한 유연한 변주, 아름답게 휜 예술적인 구조물과 예상을 뛰어넘는 창의적인 미학 구현 등이다.
호섭씨는 인터뷰 말미에 한국 공공건축 현실에 아쉬움을 언급했다. “예전보다는 공공건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고 국민들도 중요성을 알죠. 실력 있는 젊은 건축가도 많고요. 다만 (주요 발주처가 되는) 관(공공기관)의 인식 전환이 아직은 부족해 보입니다.”
자본의 논리가 건축물을 장악하는 상업건축이 아닌, 공공건축이야말로 한 나라의 문화적 소양을 가늠하는 잣대이자 현대 사회의 불안으로부터 우리 일상을 지켜줄 수 있는 버팀목이 아닐까.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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