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금리차 ‘역대 최대’지만···한은, 경기 불안에 금리 ‘동결’ 가능성
한·미간 기준금리 격차가 역대 최대 수준인 1.75%포인트로 벌어지면서 오는 25일 기준금리 결정을 앞두고 있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의 결정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금통위는 한·미간 금리 차가 물가와 환율 등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한 뒤, 국내 경제상황 등을 감안해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미간 역대 최대 금리차에도 불구하고 외환시장에서 뚜렷한 자금유출 움직임이 이 없고, 최근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대까지 내려온 데다, 분기 성장률이 0%대로 낮은 상황을 감안하면 금리동결 기조를 이어갈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3일(현지시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를 통해 기준금리를 연 5.00~5.25%로 올리면서 현재 연 3.50%인 한국과의 금리 격차는 미국 금리 상단 기준 1.75%포인트로 벌어졌다. 이는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최대 역전폭이다.
한·미간 기준금리차는 인체로 보자면 고혈압 상황에 비견될 수 있다. 혈압이 높다고 곧바로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아니지만 고혈압상황이 지속되거나 다른 부위가 나빠질 때 치명적인 합병증으로 나타날 수 있다.
달러와 같은 기축통화(국제 결제·금융거래의 기본 통화)가 아닌 원화 입장에서 기준금리가 미국보다 크게 낮아지면, 더 높은 수익률을 좇아 외국인 투자 자금이 빠져나가고 이에 따라 원화 가치가 떨어질 위험이 커진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여러 차례 “한·미 금리차에 기계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고 강조해왔지만 최근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320~1330원선으로 높아진 상황이어서 이번 연준의 금리인상이 원화 가치에 미칠 영향에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다만 원·달러 환율의 흐름을 보면 지난해 10월 급등기에는 연준의 긴축 공포에 따라 달러화 강세에 원화가 약세로 움직이는 흐름이 뚜렷했지만, 올 들어서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연준의 정책 전환 기대로 달러화가 약세를 보이는 와중에도 원화 가치가 떨어졌는데, 여기에는 대외변수보다는 무역수지 적자 지속에 대한 불안감, 실리콘밸리뱅크(SVB) 파산 사태의 여파 등 국제금융시장의 움직임에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연준의 이번 금리인상에도 불구하고 환율과 외국인 자금 동향에 큰 변화가 없다면, 금통위는 이달에도 기준금리 동결을 선택할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예상된다.
한은이 최우선 목표로 두고 있는 것이 물가 안정인데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2월 이후 14개월 만에 3%대(3.7%)로 떨어졌다. 여전히 기조적 흐름인 근원물가가 높은 수준에 있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둔화되는 흐름이 뚜렷하다. 여기에 1분기 경제성장률이 0.3%에 그치고, 하반기 전망도 기대에 못 미칠 가능성이 높아 추가 긴축을 선택하기 부담되는 상황이다. 또 1년 반 넘게 진행된 금리 인상이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를 확인하며 금리 인상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입장도 거듭 밝혀왔다.
민지희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한은은 5월 금통위에서 연내 정책 전환은 시기상조, 높은 금리 수준을 당분간 유지할 것이라는 기존 입장에서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다만 대내외 경기침체 우려가 높아지면서 긴축 사이클 종료 기대감은 유지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윤주 기자 runyj@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명태균씨 지인 가족 창원산단 부지 ‘사전 매입’
- 명태균 만남 의혹에 동선기록 공개한 이준석···“그때 대구 안 가”
- [단독] 허정무, 대한축구협회장 선거 출마 선언한다
- 최민희 “비명계 움직이면 당원들과 함께 죽일 것”
- ‘IPO 혹한기’ 깬 백종원 더본코리아… 지난달 주식 발행액 5배 껑충
- “김치도 못먹겠네”… 4인 가족 김장비용 지난해보다 10%↑
- 말로는 탈북자 위한다며…‘북 가족 송금’은 수사해놓고 왜 나 몰라라
- 경기 안산 6층 상가 건물서 화재…모텔 투숙객 등 52명 구조
- [산업이지] 한국에서 이런 게임이? 지스타에서 읽은 트렌드
- [주간경향이 만난 초선] (10)“이재명 방탄? 민주당은 항상 민생이 최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