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개발에 ‘크런치’는 필요악?…”지금 필요한 건 지속 가능한 개발 문화”

2023. 5. 4.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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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근로시간 유연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게임 업계도 술렁이고 있다. 근로시간 유연화 정책이 크런치 부활 계기가 될 것이란 우려가 번지면서다. 크런치는 게임 발매 몇 주, 몇 달 전부터 살인적인 고강도 야근 강행군으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행태를 말한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게임 업계에 관행처럼 번져있는 문화로 여겨진다. 하지만 크런치의 폐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면서 제도와 인식 개선이 이뤄졌고, 현재는 대형 게임사에서는 자취를 감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출처=셔터스톡

그러나 여전히 게임 업계 일각에는 훌륭한 게임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크런치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남아있다. 현 정부의 근로시간 유연화 정책의 핵심 철학을 대변하는 윤 대통령의 ‘주 120시간’ 발언도 이러한 게임 업계의 인식을 그대로 전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들에게 크런치는 부조리한 노동 관행이 아니라, 명작을 빚어내기 위한 장인 정신이나 열정으로 여겨진다.

지난 몇 년 동안 발매된 세계적인 흥행작들 상당수가 악명높은 크런치로 개발됐다는 사실은 이런 인식을 뒷받침하는 사례들로 비치기도 한다. ‘GTA’, ‘레드 데드 리뎀션’ 시리즈를 개발한 락스타게임즈, ‘언챠티드’, ‘라스트 오브 어스’ 등을 개발한 너티독 등 모두 게임을 내는 족족 흥행시키는 최고 수준 개발사로 꼽히지만, 동시에 살인적인 크런치로도 악명이 높았다.

레드 데드 리뎀션2. 출처=락스타게임즈

크런치가 무계획적인 개발의 산물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도 많다. 락스타게임즈의 레드 데드 리뎀션2 개발 당시 일화가 대표적이다. 게임 전문 매체 코타쿠 보도에 따르면 레드 데드 리뎀션2은 개발 막바지에 디렉터들 결정에 따라 게임 컷신 화면 위아래에 검은 가림막(레터박스)을 넣느라 개발자들이 추가 근무를 해가며 카메라 구도를 전면 수정했다고 전했다. 락스타에서 일어난 크런치 중 적지 않은 경우가 계획에 없던 결정권자들의 작은 변덕에 의해 발생했음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크런치로 땜질하며 이어간 주먹구구식 개발이 결과를 낸다면 다행이지만, 재앙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위쳐3 : 와일드 헌트’를 흥행시킨 폴란드 CD프로젝트 레드의 ‘사이버펑크 2077’은 발매일을 세 번이나 연기하는 우여곡절 끝에 나왔지만 수많은 버그, 기대에 못 미치는 완성도로 큰 비판에 휩싸였다. 전작의 명성 덕분에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회사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크런치를 장인정신으로 포장하는 건 결과론적 해석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셈이다.

크런치 문화가 결국 게임 업계를 자멸로 몰고 갈 것이라고 경고하는 이들도 있다. 게임 업계 크런치 문화를 고발해온 블룸버그의 제이슨 슈라이어는 지난 2017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크런치는 게임 업계를 굴러가게 만들고 있지만, 업계 종사자들에게 심각한 피해도 주고 있다”면서 “게임 업계를 취재하는 이들은 현 상황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이버펑크2077. 출처=CD프로젝트 레드

스웨덴 최대 사무직 노동조합인 유니오넨의 헨릭 에렌버그 정책국장은 게임 산업 전문지 게임인더스트리에 기고한 글에서 “크런치 문화는 번아웃을 야기하고, 사생활 희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개인에게도 치명적이지만, 비즈니스적 관점에서 봐도 비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과도한 초과 근무는 생산성을 떨어뜨리며, 고용주는 병가라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쁜 근무 환경으로 알려진 회사는 인재 채용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크런치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지자 변화의 물결도 일고 있다. 특히 한때 살인적 크런치로 악명 높았던 개발사들이 변화에 앞장서는 분위기다. 너티독 대표 닐 드럭만은 게임 인포머와의 인터뷰에서 “크런치 문제에 단 하나의 해결책은 없다”면서도 조직 문화와 워라밸을 개선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실제 너티독이 가장 최근 발매한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1’은 크런치 없이 개발을 완료한 것으로 알려졌다. 락스타게임즈 또한 추가 근로에 대한 보상 휴가 제도 마련하고, 차기작인 GTA6 개발에는 과도한 초과 근무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영진이 약속하는 등 조직 문화를 쇄신했다.

국내에서는 이런 세계적 흐름과 상반되게 근로시간 유연화 논의를 빌미로 크런치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사측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다시 조심스레 고개를 드는 분위기다. 하지만 오히려 회사 측이 나서서 크런치를 지속 불가능한 비효율적 개발 문화로로 규정한 곳도 있다. 창립 초기부터 크런치를 지양하는 문화를 고수하고 있는 ‘에픽세븐’ 개발사 슈퍼크리에이티브의 사례다.

에픽세븐. 출처=슈퍼크리에이티브

슈퍼크리에이티브에서는 크런치와 같은 반복적인 초과 근무를 계획과 관리의 실패로 인한 비정상적 근무 행태로 본다. 정해진 근로시간 안에 집중해서 근무한다면 초과 근무는 불필요하며, 업무 일정에 초과 근무 시간까지 산정하는 관행이 비효율적 업무 계획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슈퍼크리에이티브 강기현 대표는 “크런치는 백해무익”이라며 “늦은 시간까지 야근하는 직원들의 실제 근무 시간과 업무 효율을 측정해보면 정시 근무 때보다 오히려 낮다.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지니 결과물 품질도 떨어지고, 컨디션 난조로 휴가를 쓰는 일도 비일비재해진다”고 지적한다.

강 대표는 특히 크런치 문화가 대부분의 게임이 라이브로 서비스되는 게임 업계의 현 상황과도 맞지 않다고 말한다. “완성본 만든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라이브 서비스를 운영해야 하는 현재의 게임 산업 구조에서 중요한 건 지속 가능한 개발 환경”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슈퍼크리에이티브는 각 실무 부서장들과 개발지원팀에 과도한 초과 근무를 하는 인원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럼에도 초과 근무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부서가 있다면 인사팀이 개입해 해당 근무의 적정성을 점검하기도 한다.

슈퍼크리에이티브 인사팀 신현아 팀장은 “인사팀이 평소 프로젝트 매니저(PM) 조직과 긴밀히 소통하며 전체 개발 일정에 관심을 쏟고 있다”며 “그 덕분에 초과근무 발생 시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 빠른 대처가 가능하다”고 했다. 또 ”그러한 리스크를 사전에 대비하기 위해 수시로 부서장님들과의 면담을 진행하고 있으며 구성원분들이 업무뿐만 아니라 업무 외적 영역에도 불편사항이 없도록 세심하게 케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슈퍼크리에이티브에서 현재 개발 중인 신작. 출처=슈퍼크리에이티브

신작 출시를 앞두고 신작 담당 인원들의 초과 근무가 늘어나자, 업무 일정 조정과 대대적인 추가 채용 등을 진행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도 이런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다. 초과 근무를 불가피한 일로 여기는 대신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신현아 팀장은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원 조직의 서포트가 중요하다”며 “인원이 늘어남에 따라 관리 난이도도 높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속 가능한 개발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노력”이라고 말했다.

동아닷컴 IT전문 권택경 기자 tk@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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